
역사/문화
| 읍면구분 | 주천면 |
|---|---|
| 제목 | 판운리 |
| 내용 |
판운리
■ 판운리(板雲里) 원주군 좌변면(左邊面)에 딸린 지역이었으나 1905년(고종 42)에 영월군에 귀속되었다. 좌변면이란 주천강을 중심으로 원주쪽에서 좌측을 좌변면, 우측을 우변면이라 하였다. 이곳 지명의 유래는 구름과 안개가 넓게 끼이는 곳이므로 '널운' 또는 '너룬'이라 했으나 일제 시대인 1914년에 유목정, 삼거리, 밤뒤, 새벌, 둔전동, 가마동, 장충리 등의 행정구역을 병합하면서 '판운리'라 부르게 되었다. 판운리는 4개 행정리에 188가구 672명(1992년 기준)의 주민들이 콩, 옥수수 등의 밭농사와 특용작물을 재배하고 있다. ■ 아침치 주천(酒泉)에서 아침치 서낭당을 지나 판운리(板雲里)의 유목정(楡木亭)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예전에는 행인들의 왕래가 빈번한 고갯길이었다. 서낭당(城皇堂)이 있었던 당마루에는 이 곳을 지나는 상인이나 길손들이 돌에다 침을 뱉어서 던져놓은 큰 돌무지인 국시당(쿠당)이 두 개나 있었다. 길이 워낙 험하여 짐을 싣고가던 소, 말, 당나귀 등이 다니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아침'은 '앗촘'에서 발전된 말로 '앗'은 '이르다'는 뜻이고, '촘'은 '때'를 나타내는 단어로 '이른아침'을 의미한다. 즉, 날이 어두워지면 길을 떠나는 길손들이 유목정 주막집에서 묵었다가 이른 아침에 이 고개를 넘었으므로 '앗촘치→아차치→아참치→아침치(고개)'라는 지명이 생겼다. '치(峙)'는 '고개'를 뜻한다. ■ 새밑 아침치 밑에 있는 평평한 작은 골짜기이다. 예전에는 서너가구가 살았지만 지금은 없어졌다. ■ 유목정(楡木亭), 느릅정 아침치재를 넘어 판운리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마을이다. 신일리(新日里)에 있었던 신흥역(新興驛)에서 평창(平昌)의 약수역(藥水驛)으로 가는 역졸(驛卒)이나 행인, 관리들이 쉬었다 가던 곳이다. 조선시대 역원(驛院)제가 발전되었을 때 거리를 표시하기 위해 30리마다 장승을 세우거나 버드나무(柳木), 느티나무(槐木), 느릅나무(楡木)를 심어서 길손들의 이정표(里程慓)나 쉼터 역할을 했으므로 느릅나무가 많아서 여름한철 정자(亭子) 역할을 했으므로 느릅나무 유(楡)자를 써서 '유목정'이라 부르게 되었다. 길가에 있는 큰 나무를 정자목이라고 하는데 이 곳 정자목은 둘레가 4m정도나 되는 큰 느릅나무였는데 수명이 오래되어 말라죽은 흔적이 지금도 남아있다. ■ 느릅재(楡木峙) 유목정으로 가는 작은 고개이다. 계곡옆으로 느릅나무(楡木)가 많아서 '느릅재'라고 한다. ■ 장승백이 유목정과 너다리 사이에는 『天下大將軍, 地下女將軍』이라고 쓰여진 목장승이 있었다. 장승이 그 수명을 다하면 정월대보름날 당(堂)고사를 올릴 때 마을 사람들이 통나무를 베어 장승을 만들어 세우고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며 마을 잔치를 했었다고 한다. ■ 말미 유목정과 재밑 사이에 있는 작은 골짜기이다. 예전에 장사꾼들이 짐을 싣고 다니던 말이 죽으면 이곳에다가 묻어 주었으므로 '마로미→말미'라는 지명이 생겼는데 '미'는 이 지방의 사투리로 '묘'를 의미하므로 '말미'는 '말의 묘'라는 뜻이 된다. ■ 느다지(너다리) 유목정 도로 건너에 있는 마을이다. 서면 광전리의 덕우 뒷산에서 흘러내리는 계곡물이 유목정의 너다리 마을 가운데로 흐른다. 이 동네는 도랑을 건너기 위해서 설치한 큰 너다리(통나무를 캐어서 만든 넓은 널빤지로 놓은 다리)가 있었으므로 그 지명이 '널다리→너다리→느다지'로 변하였다 한다. ■ 사두혈터(蛇頭血基) 유목정 마을의 597번 지방도 좌측에 있는 묘이다. 예전에 판운에 사는 어느 가난한 사람이 사두혈(뱀머리 형상)의 명당터인 이 곳에다 묘를 쓰고 난 후 지덕(地德)에 힘을 입어 큰 부자가 되었다. 돈을 많이 번 후손들이 초라한 산소의 봉분을 높이고 석물과 비석을 세우고 난 후부터는 그 집안이 망해버렸다고 한다. 전하는 얘기에 의하면 사두혈(蛇頭血)은 뱀의 머리형국이므로 이 곳에다 무거운 석물을 세운 것은 결국은 명당의 혈(血)을 끊어버린 결과가 되었으므로 그 후손들이 망하게 되었다는 얘기가 전해오고 있으며 그묘는 남아있다. ■ 솟대박이 장충동(주녹골) 입구에 있었다. 이곳 솟대백이는 임 마을 출신으로 갑술과에 합격한 지경호의 과거급제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화주대(華柱臺)였다고 한다. ■ 장충동(長忠洞), 주녹골(朱帥谷) 서면 광전리 매운(梅雲)과 평창강을 사이에 두고 형성된 마을로, 충주(忠州) 지(池)씨가 개척한 지씨 집성촌이다. 백덕산(白德山, 350.1m)의 낙맥이 흘러 내려 솔봉에서 수리봉으로 이어지는 산맥은 우백호를, 청령골로 내려오는 산맥은 좌청룡을 형성하여 장충동(주녹골)을 포근히 감싸면서 마을 앞으로는 푸른 강물이 품었다가 흘러보내는 반달 모양의 '임산배수'를 구비한 곳이다. 지금도 이곳은 10만여 평의 토지가 있으며, 지계최(池繼崔)장군의 넋을 추모하는 사당인 충모원(忠慕院)이 있어 후손인 지휘정(池煇政)씨가 모시고 있다. 이곳의 원래 지명은 '주녹골(走鹿谷)'이라고 불렀는데, 그 후 지장군이 병자호란 때 나라에 큰 공을 세웠으므로 '장충동(長忠洞)'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주녹골의 유래는 마을 뒷산에 옛부터 노루와 사슴이 많았으므로 '주녹골'이라 하였다. ■ 충모원(忠慕院) 판운리 장충동(주녹골)에 있는 지계최(池繼崔)장군의 사당이다. 지계최는 1592년 판운리 주녹골에서 지세윤과 안동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16세에 송인경 장군의 딸과 결혼했으며,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관서행영(關西行瀯)의 도원수 장만(張晩)의 휘하에서 서로소모별장(西路召募別將)이 되어 서흥부사(瑞興付使)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652년 가을에 이괄의 잔당들에 의해 부인 송씨가 피살되었다. 인조 임금은 지장군을 위로한 후에 그의 여동생과 재혼을 시켰으며 송씨 부인이 살던 판운리의 주녹골을 장충동으로 바꾸고 교지를 내려 영령을 추모하였다. 청나라가 쳐들어오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지장군은 서흥의 검수참(劒水站)에서 수백 명의 적병을 죽이고 인조 임금이 계시는 남한산성으로 달려가다가 신계(新溪)에서 적을 만나 사력을 다하여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자 남향 4배(南向四拜)한 후 자결하였다. 그때가 1636년(인조 14)으로 인조는 통곡을 하면서 지계최장군을 『갈성진 무공신 조선조 충신 가선대부 한성판윤(漢城判尹)』에 추증하고 충성군(忠城君)에 봉한다는 교지와 함께 그의 가족에게는 노비 4명, 경호인 2명, 은 20냥, 말 한필, 그리고 토지 60마지기를 하사하였다. 장충동에는 지장군의 13대 후손인 지휘정(池輝政)씨가 장군의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충모원을 건립한 후 장군과 함께 고려 공신인 지용기 장군, 조선충신 지여해장군 등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으며, 별실에는 단군의 영정을 모시고 있으며 지역문화 발전과 청소년들의 충효사상을 고취시키기 위하여 매년 추모제를 올리고 있다. ■ 작부리 약수터 밤뒤삼거리에서 597번 지방도를 따라 유목정으로 가다보면 그 서남쪽으로 작부리 약수터와 장충휴게소로 가는 길게 뻗은 시멘트 포장길이 있다. 이곳의 지명은 돌이 많아서 '작부리'라 칭하고, 그 우측 너럭바위에서 나오는 맑고 찬 약수는 '작부리 약수터'라고 부르는데 여름 한철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작'은 '돌'을 뜻하므로 '돌부리와 너럭바위가 많은 곳'이라는 뜻이다. ■ 식양지(食陽地) 청령골 밑에 있는 양지 쪽 계곡으로 수량이 풍부한 샘이 있다. 장충동 사람들이 식수로 이용하는 상수원지가 있기 때문에 예전부터 '식양지' 또는 '식양지 약수터'라 하였다. ■ 청령골 백덕산(흰덕산) 줄기가 뻗어내려 솔봉을 형성하고 그 낙맥이 청령골로 흘러내려 평창강과 접하고 있다. 이곳의 위치가 풍수학상 좌청룡에 속하므로'청령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 장군바위 솔봉과 수리봉에서 뻗어내린 낙맥이 멈추면서 평지를 이루었는데 그곳에 큰 소나무 두 그루와 우뚝 솟은 바위가 장군처럼 버티고 있으므로 '장군바위'라고 부른다. 장군바위 등마루 밑에는 충주 지씨(忠州池氏)들의 종산(宗山)으로 지계최 장군 후손들의 묘소가 있으며, 장군바위, 거북바위, 사람 형상 등 여러 모양의 바위가 있다. ■ 용마샘 장군바위 밑에 있는 샘이다. 1593년(선조 26년)에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지낸 제세륜(池世倫)의 처 안동 김씨는 배거리산에 있는 산제당골 샘터에서 메를 지어놓고 자식을 점지 해달라고 100일 동안이나 기도를 하였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산신령이 나타나서 "너의 정성이 지극하니 수리봉 장군바위 밑에 있는 용마샘터에 가서 100일만 더 정성을 드리면 奴遍봤淪?수 있다."고 일러주었다. 그리하여 김씨부인은 용마샘에서 목욕 재계한 후 장군바위에다 정화수를 떠놓고 지극정성을 다하여 아들(지계최)를 낳았다고 한다. 이 용마샘은 약수로도 효험이 있어서 피부병 오른 사람들이 이 물을 마시고 목욕을 하면 낫는다고 한다. 옛날 주녹골에 산던 지씨(池氏)집안에서 아기장수가 태어났는데 그 부모는 겁이나 관아(官衙)에서 알기 전에 겨드랑이 밑에 있는 날개를 인두로 지져서 태운 다음 큰 연자방아로 눌러 죽였다고 한다. 아기장수가 죽은 지 사흘 후에 장군바위 밑에 있는 이 용마샘에서 말이 나와 주인을 찾으면서 마을 앞에 있는 용마루를 뛰어다니며 울부짖다가 죽었다는 전설이 있다. ■ 미다리(未橋) 밤 뒤 강 건너편에 있는 마을이다.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어 교통이 불편하지만 땅이 기름지고 농사가 잘되는 곳으로 밤나무가 많았다. 이곳은 지하 터널을 뚫고 물의 낙차를 이용한 소수력발전소 설치가 적합한 지역으로 현재 교량건설을 하고 있으므로 주민들의 생활이 좀 더 편리해 질 것이다. '미다리'라는 지명은 여름철에는 나룻배를 이용하고 늦가을이 되면 나무를 베어다가 덕우를 만든 다음 그 위에다 청솔갑(소나무가지)과 흙으로 덮은 둑다리를 놓아서 이용하였다. 그러나 여름 장마 때면 둑다리가 떠내려가고 없으므로 '미다리(未橋)'라고 부르게 되었다. ■ 장광(長廣) 미다리 앞에 있는 크고 넓은 벌판으로 자갈과 모래가 많으므로 '장광'이라 한다. 입탄(立彈)과 중선(仲仙)에서 떠내려오는 석질이 강한 산수경석과 수마석, 토중석이 많아 수석인들이 즐겨 찾는 탐석지로 유명한 곳이다. ■ 꽃등바우(花岩) 판운리(너룬)의 판운초등학교 강 건너에 있는 벼랑이다. 둥글게 생긴 벼랑으로 주변에 꽃나무가 많아서 봄이 되면 바위 전체가 불타오르듯 붉게 꽃이 피어나므로 '꽃등바우'라고 부른다고 하나, 실제로는 똑바로 서 있는 벼랑으로 된 바위이므로 '꼴두바우→꽃등바우'라 하였다. ■ 모란 너룬 동쪽으로 평창군(平昌郡) 대하리(大下里)와 경계가 된다. 이 마을은 강이 있어 교통이 불편하여 가을에는 뚝다리를 이용하였다. 땅 이름의 뿌리는 산모퉁이 아래에 있는 마을이므로 '몰앗→몰안→모란'이라는 땅 이름이 생겼다. 즉 '몰'은 '산'을 '앗'은 '밭'을 의미하므로 '몰앗'은 '산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 鈒?中仙 판운 삼거리에서 북쪽으로 약 30리 정도 뻗은 깊은 골짜기로 자연 경관이 아름답고 사시사철 맑은 계곡이 흐르고 있다. 백덕산 줄기에서 흐르는 물이 넓은 냇물과 돌광장을 이루었다. 예전에는 '장광마을'이라고 불렀으나 마을 뒤에 '신선봉(神仙峰)'이 있다고 하여 '중선'이라 하였다. 이곳 계곡에서는 산수경석(山水景石)이 출토되어 수석산지로도 이름이 높다. ■ 가마동(駕馬洞) 중선과 수주면 당거리 뒷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합쳐지는 곳으로 삼면이 개울로 둘러싸여 있고 마을 앞에는 논이 많다. 이 곳 땅이름의 유래는 중선천을 건너기 위해 큰 널다리를 가로 얹은 '멍에목(다리를 걸친 언덕의 목이 되는곳)'이 세월이 흐르면서 '멍에 가(駕)'자를 써서 '가마동(駕馬洞)'이라 부르게 되었다. ■ 푯대봉 와촌등(기와집말)의 갈산 뒤에 있는 높은 봉우리이다. 일제가 우리의 농토를 수탈하기 위하여 1912년부터 1918년까지 실시한 토지조사 사업때 토지를 측량하기 위하여 푯대를 세웠다. 이 곳도 그 당시에 일본인들에 의해서 산봉우리에 삼각 기점을 잡은 푯대가 세워졌으므로 '푯대봉'이라 한다. ■ 신랑봉 혈터 중선 동쪽인 신선봉 밑에 있는 바위로 우뚝 솟은 바위가 사모관대를 한 신랑의 형상을 하고 있다. 이곳 신선봉은 산세가 수려하므로 일제가 이 산의 정기를 끊기 위해서 혈(血)에 쇠말뚝을 박았으므로 '신랑봉혈터'라고 부른다. 일제는 이처럼 우리 국토의 곳곳에 많은 쇠말뚝을 박아 놓았다. ■ 신선봉(神仙峰) 중선 동쪽에 있는 가장 높은 산봉우리이다. 날씨가 개이면 안개가 신선봉을 감싸고 있어 신비를 더 해주는 산이다. 그 꼭대기에는 큰 너럭 바위가 있고 네 귀퉁이는 큰 자연석으로 고여져 있다. 옛날에 신선들이 이 곳에서 장기를 두며 놀았다하여 '신선봉'이라 불렀다고 한다. ■ 탑둔지 중선분경 뒤에서 수주면(水周面) 법흥리(法興里)로 넘어가는 고갯마루 둔덕에 있는 국시당터이다. 너룬(판운) 사람들과 소장사들이 이 고개를 넘고 무릉치(茂陵峙)를 지나 법흥리의 새터로 다녔다. 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다니던 옛길로 행인들이 돌을 주어서 침을 뱉은 다음 여행의 안녕을 기원하며 돌탑(국시당)을 쌓았으므로 '탑둔지'라는 지명이 생겼다. 지금도 두 개의 돌탑이 남아있다. ■ 중선천(仲仙川) 백덕산 줄기인 물푸레재와 교합동(삼거리)에서 시작되어 너룬(판운)을 지나는 중선천은 기마동 밑에서 평창강과 합류한다. 이곳은 오염되지 않은 맑고 찬 계곡으로 주위에 논이 많다. ■ 송골(松谷) 중선 북서쪽으로 소나무가 우거진 골짜기이므로 '송골'이라고 한다. 중선 사람들은 송골을 지나 평창과의 경계인 자라고개를 넘고 수석산지(토중석)로 유명한 입탄리(入彈里)와 약수리(藥水里)를 지나 평창 장에서 장(場)을 보고 돌아왔다. ■ 물푸레재 백덕산의 중무치(重務峙) 줄기가 뻗어내려 평창군 입탄리와 경계를 이루었으며, 서쪽으로는 실개천과 함께 예전에 농기구와 생활용구를 만들던 물푸레나무가 우거진 둔덕이 있었으므로 '물푸레재'라 불렀다. 옛날 화전민들은 잘 휘고 단단한 싸리와 물푸레나무로 큰 장독 모양의 채독을 만든 후 쇠똥을 발라서 사용하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채독은 보온, 보냉 효과가 좋고 그 안에 든 곡식은 벌레가 생기지 않았다. 그 외에도 속이 연해 잘 파이는 피나무는 김치독이나 되, 말 등으로 이용되었고 그 껍질은 주루막이나 망태기를 만드는 데 이용되기도 하였다. 산촌인 영월에 '물푸레재, 피나무골, 재피골, 싸리나무골'등의 지명이 많은 이유도 이러한 나무가 화전민들의 각종 생활용품으로 많이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이 고개를 넘으면 평창 새목으로 갈 수 있다. ■ 자료출처:「영월 땅 이름의 뿌리를 찾아서」저자 엄흥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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