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문화
| 읍면구분 | 주천면 |
|---|---|
| 제목 | 금마리 |
| 내용 |
금마리
■ 금마리(金馬里) 금마리는 원주군 우변면 지역으로 윗기마동이라고 부르고 용석리(龍石里)는 아랫기마동이라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삼국 시대부터 이곳에는 '금마곡소(金馬谷所)'라는 천민 집단구역이 있다. 수공업과 광업에 종사했는데 그 위치는 『金馬谷所 在酒泉縣南十五里, 금마곡소는 주천현 남쪽 15리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1905년(고종 42) 원주에서 영월군 양변면에 편입되었고 마을 앞으로는 제천으로 연결되는 지방 도로가 확장되었으며 현재 4개리 162가구 608명의 주민이 주막거리, 사기막, 장승백이, 가오개, 결운, 산외실, 바둑골 등지의 자연 부락에서 생활하고 있다. 주민들은 주로 농업에 종사하고 있는데 쌀, 콩, 팥과 같은 식량 작물과 참깨, 들개, 담배, 고추, 약초 등의 특용 작물을 재배하고 있다. ■ 금마리 독립만세 기념비 신일리와 금마리 사이인 솔치고개에 있다. 1919년 3.1만세운동 당시 영월지역에서는 유일하게 항일만세운동을 벌인 곳이 주천면 금마리 장터로, 주동자 박수창 등 4명은 고종황제 장례식에 참석코자 서울에 상경하였다가 독립만세운동을 보고 귀향하여 1919년 4월 21일 태극기 및 독립선언문을 제작하고 석명선 영월군수 일행이 주민들의 동요를 막기위해 금마리로 들어서자 몽둥이로 위협 만세연명부에 서명케 한 후 주민 200여명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만세운동 후 주민 43명이 주천헌병대로 끌려가 심한 고문을 받았으며 주동자 박수창 등 17명에게는 경성지방법원 조선총독부 판사로부터 각각 징역 1년에서 2년형이 선고되었다. 이에 영월군에서 유일하게 전개된 금마리 독립만세운동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하여 1992년 주천면 금마리 산 225에 독립만세기념비를 건립하였다. 기념비는 4천 5백 20평의 부지에 사업비 1억 8천여만원을 들여서 폭 1.5m, 길이 3.2m의 화강암 밑받침에 높이 4.55m의 청동 조형물로 세워졌다. ■ 솔치재(松峙) 금마리 북쪽의 597번 지방도이며 신일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이곳 고갯 마루에는 큰 소나무들이 무성하므로 '솔치재'라 부른다. ■ 방아숲 곳집 동쪽에 있다. 예전에 밤나무숲 속에 작은 연자방아가 있었으므로 '방아숲'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지금 이곳에서 솟아나는 맑은 샘물은 금마리 주민들의 상수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 배재(梨峙) 큰 마을 북서쪽에 있다. 고개 입구에 큰 돌배나무가 있었으므로 '배재(梨峙)'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재를 넘으면 충북(忠北) 송학면(松鶴面) 오미리(五味里)의 평촌으로 간다. 이곳의 물은 금마리 간이상수원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수백년 묵은 소나무가 있는데 나라에 큰 재앙이 있을 때마다 이 나무가 운다고 한다. 몇 년 전에 외지에 있는 조경업자가 이 소나무를 사서 뿌리 돌림을 한 후 영월군에 반출 허가를 얻으려고 했으나 실패하였다. 군에서는 이 나무를 살리기 위하여 수간 주사를 놓으면서 보살폈지만 결국 죽고 말았다. 이 소나무는 청령포의 관음송, 녹전리 솔치고개에 있는 소나무와 함께 영월의 기념비적인 나무였다. ■ 골사기막 서낭당(城皇堂) 사기막에 있었는데 당(堂)은 1970년 새마을운동으로 불태워지고 지금은 커다란 가랍나무(참나무)만 당목(堂木)으로 보존되고 있다. 전에는 성황님이 타고 다닌다는 철마 다섯 마리가 있었고 당집 안에는 『城皇神位』라고 쓰인 위패가 모셔져 있었다. ■ 골사기막 사기막 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전에는 대여섯 가구가 살았으나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다. 마을 앞에 좋은 묘자리가 있었는데 산의 주인은 금마리 갑부인 임부자의 터였다고 한다. 그 때 같은 마을에 사는 밀양 박씨(密陽朴氏)가 부친상을 당하자 그곳에다 아무도 모르게 밀장(密葬)을 하였다. 그 후부터 밀양 박씨 집안은 차츰 번성하였다고 한다. ■ 곱돌고개 주막거리 남쪽 충북 송학면(松鶴面) 송한리(松寒里)와 경계인 미고개 아래에 있다. 석회암(石灰岩)으로 형성된 고갯마루로 이곳에는 매끈매끈하고 감촉이 있는 횟돌(곱돌)이 많았으므로 '곱돌고개'라 한다. ■ 장승백이 금마리에서 충북 송한리로 가는 고갯마루에 『天下大將軍, 地下女將軍』이라고 쓰여진 나무 장승이 서 있었으므로 이곳을 '장승백이'라고 불렀다. 장승은 길손들의 이정표 역할과 마을 신앙의 대상이었다. ■ 금마저수지 큰 마을과 미고개 사이에 있다. 일제 시대인 1935년(昭和 10)에 박창희씨의 감독으로 축조된 저수지로 물세는 징수하지 않았다고 한다. 둘레는 150m, 수심은 5m, 저수량은 약 9,000톤이 된다. ■ 미고개 주천면 금마리의 주막거리에서 충북 송학면 송한리의 교촌으로 넘어가는 경계에 있는 고개이다. 금마리 앞산이 말(馬) 형상이고 이 곳은 말꼬리에 해당되는 곳이므로 '꼬리 미(尾)'자를 써서 '미고개'라는 지명이 생겼다. ■ 둥지미 풍수학(風水學)상 둥지미는 금마리 맞은편에 있으므로 안산(案山)에 해당된다. 산세(山勢)가 새둥지처럼 생겼으므로 '둥지미'라 부르고 있으며, 이 둥지미의 지세는 금마리를 포근하게 감싸주는 형태로 마을에 큰 변고가 일어나지 않고 항상 평화롭다고 한다. 뒤에 있는 '화살미'에는 옛날 철광이 있었는데 질이 좋지 않아서 폐광이 되었다. 둔지미는 둔덕 위에 있으므로 '둔지미'라 부르다가 '둥지미'로 변한 것 같다. ■ 원진바위 금마리의 주막거리에서 가오개로 가는 도로 옆에 있는 바위이다. 원진바위와 이긴 바위는 금마리 하천 가에 7m정도의 거리를 두고 놓여 있는 두 개의 너럭바위인데 도로확장으로 이 긴 바위는 없어졌다. 주천이 현(縣)이었을 당시 현령으로 부임한 고을 원이 이방(吏房)을 데리고 민심을 살피려고 이곳으로 왔었다고 한다. 원님은 이방을 건너편 바위로 올라가게 한 후 자신도 원진바위로 올라가서 이방의 기를 꺾기 위해 질문을 했다. "저 오리는 십리를 가든지 백 리를 가든지 언제나 오리라고만 하니 그 무슨 이치인가?" 눈치 빠른 이방은 "할미새는 어제 나도 할미새, 오늘 나도 할미새라고 하니 그 이치는 무엇입니까?" 원님은 '이놈이 보통이 아니구나'하면서 "창(槍)으로 창(窓)을 찌르면 그 구멍은 창(槍)구멍이라고 하는가 창(窓)구멍이라 하는가?" "나리님 눈오는 날에 눈(雲)이 눈(眼)에 들어가 눈(眼)물을 흘리면 눈(雲)물 입니까, 눈(眼)물이라 해야 합니까? 결국 원님은 아무런 대꾸도 못하고 바위에서 내려왔으므로 이 때부터 이 바위를 '원진바위'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원진바위의 전설은 조선일보 이규태 칼럼에도 소개되었다. ■ 머나실 금마리 동북쪽으로, 쉰다랭이의 남쪽에 있다. 마을 뒤쪽에는 호랑터골과 철철바위가 있으며 주막거리와 떨어진 외딴 마을이다. 에전에 젊은 부부가 살았는데 어느 날 호랑이가 부인을 물고 가서 큰 바위 앞에서 잡아먹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부부가 살던 집터가 있는 곳을 '호랑터골'이라 하고 피가 철철 흐르던 이 바위를 '철철바위'라 부르게 되었다. 이 마을은 호랑이가 나타나는 멀고 외딴 마을이므로 '먼마을→먼마실→머나실'로 부르게 되었다. 그 때 호환(虎患)에 갔던 젊은 부인의 시신은 미고개에 있는 '화장골'에서 불태웠다고 한다. 수십년 전만해도 강원도의 산간 지방에는 호환(虎患)을 당한 사람들이 많아서 밤늦게 산길을 다닐 때는 호랑이가 무서워한다는 솔가지 횃불을 들고 다녔다. ■ 쉰다랭이 가오개 북쪽으로 빗물에만 의존하여 농사를 짓는 천수답(天水沓)인 다랑논이 있는 곳이다. 이곳은 산골짜기의 층계식의 작은 논다랭이로 땅의 평수는 작지만 다랭이 수는 많다. 예전에 한 농부가 쟁기로 논을 다 갈고 나서 몇 다랭이(마지기)인지 세어 보았더니 마흔아홉 다랭이밖에 안되어서 다시 세어보았더니 한 마지기를 찾지 못했다고 한다. 그 농부는 할 수 없이 쟁기를 짊어지고 옆에 있는 방갓을 들고 보니 한 다랭이가 그 밑에 있었으므로 그 때부터 이곳을 '쉰다랭이'라고 불렀다는 얘기가 전한다. 다랭이는 논과 밭의 크기를 나타내는 단위로 보통 한 말의 씨앗을 뿌릴 수 있는 땅으로 대개 논은 200평, 밭은 300평을 말하며, 두락(斗落)이라고도 한다. ■ 결운(結雲) 가오개와 바둑골 사이에 있는 마을로 주천초교 결운분교가 있다. 주위가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산꼭대기에 항상 많은 구름이 모여 있으므로 '결운'이라 부르게 되었다. ■ 산이실 상금마 동북쪽으로 결운 밑에 있는 마을이다. '산이실'이란 지명의 유래는 바닥골(평지마을) 위쪽인 '뫼 밑에 있는 산촌(山村) 마을'이라는 뜻이다. 즉 '산이'는 '산 안에 있는 동네'를 뜻하고, '실'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 바둑골(바닥골) 산이실 북동쪽으로 주천장을 가로지르는 금마대교(金馬大橋)가 있는 곳이다. 이곳은 넓은 들녘인 바닥(평지)에 형성된 마을이므로 '바닥골→바둑골'이라 불렀다. 바둑골 뒤에는 비가 온 후에는 항상 구름이 끼는 구름다리산이 있으며 그 곳에는 일제시대 때 금을 캐던 흔적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 자료출처:「영월 땅 이름의 뿌리를 찾아서」저자 엄흥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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