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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유래

Home 역사/문화 지명유래
작성일 2017.12.04 , 조회수 1640
역사/문화>지명유래 상세보기 - 읍면구분, 제목, 내용, 파일 정보 제공
읍면구분 김삿갓면
제목 진별리
내용 ■ 진별리(津別里)
진별리는 남한강 상류에 있는 마을로 일제강점기인 1914년에 '나루두둑'이라고 부르던 '진구리(津邱里)'와 '베리골'이라 부르던 '별이곡(別梨谷)'에서 '진'자와 '별'자를 따서 '진별리'라 부르게 되었다.

진구리는 옛날 소금, 생선 등을 판매하던 나룻배가 드나들던 나루터가 있었으며 그 건너편에는 국민관광지로 지정된 고씨동굴이 있다. 진별리는 꽃절, 고습어구, 가리골, 베리골, 진구리, 돌앞개, 지푼개, 당골, 양주터 등의 자연부락에 50여가구 175명의 주민들이 주로 농업에 종사하며 생활하고 있다.

■ 베리골(別梨谷)
정양리(正陽里)와 진별리(津別里)의 경계인 각시바위(모처녀바위)에서 고씨굴 쪽으로 약 500m쯤 가다가 좌측으로 들어가 있는 마을이다. 골짜기가 매우 깊고 벼리(베리)밑에 있으므로 '벼리골→베리골'이라고 불렀다. 베리골을 한자식으로 표기하여 '별이골(別梨谷)'이라고도 부르는데 조선시대의 권섭(權燮, 1641∼1721년)은 「영삼별곡(寧三別曲)」이라는 기행가사에서 별이골(베리골)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별이실 외딴 마을 해는 어이 쉬 넘거니

봉당(封堂)의 자리 보아 더새고 가자스라

밤중에는 사립밧기 긴 바람 니러나며

삿기곰 큰 호랑이 목가라 우는 소리

산골이 울혀이셔 기염도 흘난할샤

칼빼며 겻희노코 이 밤을 계유새와 ----

권섭(權燮)은 숙종 때 사람으로 호는 옥소(玉所) 또는 백취옹(百趣翁)이고 자는 조원(調元)이라 했다. 「영삼별곡」은 그가 34세 숙종 30년(1704)에 삼척 부사로 있던 외조부 이세필(李世弼)을 찾아왔다가 영월, 삼척 일대의 명승지를 답사하면서 지은 기행가사로 그의 초고문집인 「옥소고(玉所稿)」에 실려 있다. 권섭은 44세때 충북 청풍으로 이사하여 살면서 진경산수화를 그리는 정선과 교류했으며, 54세에 제천 문암동으로 이주하여 89세로 세상을 뜰때까지 50여권의 문집을 남겼다.

■ 고습어구(高濕谷口)
영월읍 정양리와 하동면 진별리의 경계이 모처녀바위를 지나 고씨동굴로 가는 595번 지방도의 좌측인 미래가든이 있는 곳이다. 베리골로 들어가는 골짜기 어구로 항상 물이 고여 있고 축축한 기운이 있다.

■ 용담굴(龍潭窟)
진별리 베리골 왼쪽의 8부능선에 있으며, 강원도 기념물 23호로 지정되었다. 이 동굴은 고생대(古生代)의 석회암층으로 길이는 350m에 이르는 수직굴로 내부의 온도는 계절에 관계없이 15∼18℃가 된다. 4개의 큰 광장만 수십만년 전에 생성된 석순과 종유석들이 있고 30여 종의 생물이 살고 있으며 그동안 학계에서 많은 학술조사가 있었다.

■ 텃말(基村)
베리골의 중심 마을이다. 이 골짜기에 들어온 사람들이 가장 먼저 터를 잡고 살았다 하여 '텃마을'이라 했으며, 지금도 마을에는 작은 연못 주위로 10여가구가 살고 있다. 이 베리골은 1970년대 화전 정리를 하기 전 만해도 70여 가구가 살았던 큰 마을이었다. 화전민들은 골짜기마다 흩어져 살았는데 마을의 모임이나 민속놀이는 이곳 텃말에서 이루어졌다.

■ 곰배나무골
텃말 북쪽에 있다. 흙덩이를 깨뜨리는 농기구 곰배(곰방메의 사투리)를 만드는 물푸레나무가 이곳에 많았으므로 불리어진 이름이다.

■ 곶절개(화절치)
예전에 절이 있었던 곳으로 돌앞개 북동쪽에 있다. 봄이 되면 진달래와 철쭉꽃이 피어 동네 어린이들이 참꽃을 꺾으러 왔으므로 '꽃절개→곶절개'라고 불렀다.

지금으로부터 30∼40년전 만해도 보리고개가 있어 산에 올라가 참꽃(진달래)을 따먹거나 칡, 찔레순, 목화 열매를 먹으면서 허기진 배를 채우는 일이 허다하였다. 옛날에는 참꽃밭에 가면 참꽃문둥이가 잡아먹는다 하여 여러 명이 떼를 지어 다니기도 하였다.

■ 늪둔지
곶절개 위에 있는데 항상 물이 고여있는 늪이 있는 언덕이므로 '늪둔치→늪둔지'라고 불렀다. 이곳은 1만여 평의 넓은 들녘으로 초지를 조성하여 목장으로도 이용되었다.

■ 새양개
지푼개 동쪽에 있는 양지바른 실개천이다. '새'는 '동(東)쪽'을 뜻하고 '양(陽)'은 '양지(陽地)바른 곳'을, '개'는 '시냇물이 흐르는 곳'을 의미한다. 즉, 양지쪽에 있는 냇가라는 뜻이다.

■ 양주터
둔지머리와 들곤이 사이에 있다. 「정감록」에 의하면 큰 난리와 굶주림에서 살아날 수 있는 십승지(十勝地)의 일곱째는 『영월 정동쪽 상류인데 난리가 나면 종적을 감출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수염이 없는 자가 먼저 들어오면 안된다. 寧越正東上流 可臧亂踪 無髮者先則否』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 기묘사화 때 큰 화를 당한 조광조(趙光組)의 후손들이 공주로 낙향했다가 임진 왜란때 평창 주진을 거쳐 베리골과 명생동에 정착하였다. 한양 조씨 후손들이 십승지를 찾아서 하동면 와석리 조촌(趙村)에 터를 잡고 마을 입구를 미사리(未死里)라 하고, 그 안에 있는 마을은 명생동(命生洞)이라고 불렀다. 그후 후손들이 이 골짜기에서 계속 살았으므로 그 곳의 지명도 조촌(趙村, 조씨들의 집단거주지)이라고 불렀고 와룡초등학교 와석분교가 있다. 즉 한양조씨 17세손인 홍필(弘必, 1707∼1777년)이 처음으로 하동면에 터를 잡고 살다가 죽었는데 그의 묘는 부인 인동 장씨와 함께 진별리 베리골에 묻혔으므로 '양주터'라는 지명이 생기게 되었다. 지금도 이 산소는 후손들에 의해서 잘 관리되고 있다.

■ 매봉재
베리골에서 연하리 계사동(연하폭포)으로 넘는 고개이다. 매봉산에 있는 고개이므로 '매봉재'라 하는데 산나물이 많이 나는 곳이다. '매봉'이란 그 주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뫼봉→매봉'이라는 뜻의 '매'가 '수리매'로 변하여 '수리봉, 수리산, 매봉산'으로 불리어 지게 되었다.

■ 진구리(津邱里)
원 지명은 나루두둑이다. 고씨굴 앞에 있는 마을로 나루터 둔덕에 있는 마을이므로 '나루두둑'이라고 했다. 이곳 지형이 배 형국이므로 옛날부터 이 마을에서는 우물을 파지 못하게 하였다. 즉 우물을 파는 것은 배 밑바닥을 파서 구멍을 내는 격이므로 배가 침몰하면 마을에 큰 재앙이 생긴다고 믿고 있었다. 전에 어느 집에서 우물을 팠는데 송아지 한 마리가 빠져 죽자 그 우물을 메웠다고 한다. 이곳의 식수는 논이골의 간이상수원이 이용된다.

■ 고씨굴(高氏窟)
나루두둑(진별리)의 강 건너에 있는 굴이다. 원래는 '노리곡석굴(魯里谷石窟)'이라 했으나 의병장 고종원(高宗遠) 일가가 임진왜란 때 피난을 했으므로 '고씨동굴'이라 하였다.

4억년의 신비를 자랑하는 이 굴은 호수, 폭포수, 광장 등과 24여종의 미생물이 서식하며 1985년부터 국민관광지로 개발되었다. 고씨굴에는 횡성 고씨(고종원 일가)들이 피난을 하면서 밥을 짓기 위해 불을 때어 그을린 흔적과 솥을 걸었던 자리가 남아 있다.

■ 다랭이골
구마봉 밑에 있는데 진별리의 공동묘지로 이용되고 있다. 구마봉이 말(馬)의 머리부분이면 이곳은 다리에 해당되는 위치이므로 '다랭이골'이라 한다.

■ 시막골(侍幕谷)
진별초등학교 뒤에있는 골짜기이다. 영월의 의병장 고종원(高宗遠)의 어머니인 엄씨(마대 엄의 집안에서 출가)의 산소가 있다. 엄씨는 1589년 11월 20일에 작고했는데 며느리인 창령 조씨가 이곳에다 막(幕)을 치고 3년동안 시묘(侍墓)를 살았으므로 '시막골'이란 지명이 생겼다.

이 마을에 살던 고만성(高萬星, 88년도 83세)씨가 이곳에서 오소리굴을 발견하여 땅을 파다 불을 지핀 흔적이 있는 구들장을 발견했는데 이곳이 바로 시막터였다고 한다. 그리고 산소 앞에 있는 큰 느티나무는 그때 심은 것이라 한다. 고씨굴 앞 도로 가에 있었던 열녀각(烈女閣)은 1972년 8월 홍수로 없어졌다.

■ 부들골
시막골 위쪽에 있는 골짜기로 습한 곳에서 잘 자라며 잎과 줄기로 방석이나 부채를 만들 수 있는 부들이라는 풀이 많아서 '부들골' 또는 '부드라이골'이라 부른다.

■ 울여울(鳴灘)
고씨동굴과 각동교(角洞)사이에 있다. 여울 건너편으로 깎아지른 듯한 층암 절벽 위에 큰 노송나무가 남한강 줄기를 굽어보고 있으며, 그 밑으로 긴 여울이 흐르는데 여울물 흐르는 소리가 크게 울리어 '울 鳴'자와 '여울 灘'자를 써서 '鳴灘' 즉 '울여울'이라 하였다.

「寧越付邑誌」에 『鳴灘 在虎灘下二十里水急 울여울은 범여울 20리 아래에 있으며, 물살이 급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 핏골
울여울 동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로 의병과 왜구들이 싸울 때 핏물이 흘렀던 곳이므로 '핏골'이라 한다. 임진왜란 때 왜병이 침략하자 진별리에 살던 고종원(高宗遠), 고종길(高宗吉), 고종경(高宗慶) 형제가 영월을 지키기 위해 각 지역에 통문(通文)을 보내 의병을 모집하였다.

문무(文武)에 뛰어난 고종경이 의병장이 되었는데, 강원도 감사였던 유영길(柳永吉)의 명으로 병사 5백명을 거느리고 원주 흥원창(興原倉)으로 진군하다 왜적을 두려워하는 많은 병사들이 도망치는 바람에 고종경은 도착일을 지키지 못하고 처형이 되었다. 그 후고종경의 억울함이 밝혀져 유영길은 파면되고 참판 강신(姜紳)이 감사로 임명되었다. 고종원의 가족은 왜구가 진별리까지 쳐들어오자 노리곡석굴(魯里谷石窟)로 피난했는데, 그 당시 불을 지펴 밥을 지은 흔적이 지금도 고씨굴에 남아있다. 왜구들은 고씨 가족이 피난하는 굴 앞에 나무를 쌓아놓고 불을 질렀으며 고종원, 종길 형제는 굴 밖으로 나와 왜구의 포로가 되고 고종원의 부인 조씨(曹氏)는 굴 안의 소(沼)에 투신했다.

포로가 된 고종원 형제는 1592년 8월 17일 영월읍 봉서루에 평창군수 권두문(權斗文)과 사산감역(四山監役) 이사악(李士岳), 평창 중방(中房) 고산영(高産英) 등과 함께 감금되었다. 이들은 주천 빙허루에서 하루를 지내고 산림을 지나 원주로 압송되어 목책 속에 수용되었으나 9월 초하루 밤이 깊어지고 소낙비와 번개 소리가 요란한 틈을 타서 목책의 기둥을 뽑아버리고 권군수 일행과 함께 탈출하였다. 그러나 수렁에 맨발로 단구역(丹丘驛)에 다다른 이들은 뒤를 추격하는 왜구에게 붙잡혀 아우 종길은 살해되고 종원은 목숨을 부지하여 힘들게 진별리로 돌아온 사연이 고종원의 일기인 「기천록(紀天錄)」에 기록되어 있다.

그 당시 진구리(津邱里)의 핏골을 중심으로 남한강 계곡은 왜구들의 살육과 방화로 피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 자료출처:「영월 땅 이름의 뿌리를 찾아서」저자 엄흥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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