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문화
| 읍면구분 | 산솔면 |
|---|---|
| 제목 | 이목리 |
| 내용 |
이목리
■ 이목리(梨木里) 이목리는 화원리와 녹전 사이에 있는 마을로 원래는 상동읍 이었으나 1986년 4월 1일 영월군의 행정 구역 개편으로 중동면에 편입되었다. 이목리라는 지명의 유래는 옛날 어느 도사가 이곳의 형국이 이화낙지형국(梨花落地形局)이므로 배나무를 심으라고 하였다. 원터에 있었던 배나무도 이 때 심은 것이라고 한다. 이목리는 다른 지역보다 배나무가 많았으므로 순수한 우리말로 '뱃재'라고 불렀으나 그 후 '이목리(梨木里)'로 변하였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이웃에 있는 횟골을 병합하였으며, 1개 법정리에 78가구 307명이 상이목, 하이목, 횟골, 그리고 통일신라시대 큰 절이 있었다는 고장동 등의 자연 부락에서 고추, 마늘, 옥수수 등의 밭농사로 생활하고 있다. 이곳에는 400여 년 전 경주 김씨들이 가장 먼저 정착하였다고 한다. 창터 마을에는 전세와 대동미 등 관곡을 보관하던 20칸 짜리 동창(東倉)이 있었고, 녹전리와 경계가 되는 선령약수 건너편 돌서덕에는 세아름이 넘는 큰 신배나무 밑에 원터가 있었다. 이곳 원집에는 식량과 반찬, 짚신 등을 비치해두어 수라리재를 넘어 다니는 길손들에게 숙식을 제공해 주던 곳이다. 물건을 이용한 만큼 엽전을 나무에 꽂아놓았다고 한다. ■ 선령약수(仙靈藥水) 수라리재를 넘고 이목리와 녹반리(녹전리)의 경계인 31번 국도 아래에 있다. 옛날 어떤 나병 환자가 이 물을 먹고 병을 고쳤으며, 위장병, 습진, 피부병에 효과가 있는 신령스러운 약수라는 뜻이다. 88년 주위의 조경 사업을 마쳤으며,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으로 국도가 개통되기 전에는 장구목재를 넘어 장승백이의 녹전 주막거리로 다니는 옛길이 있었다. ■ 창터(倉基) 아래뱃재(下梨峴)인 선령약수 위쪽에 있었다. 상동과 중동면 지역의 전세(田稅)와 대동미(大同米), 균세(均稅)를 징수하여 보관하던 동창(東倉)이 있었던 곳이므로 '창터'라고 부르고 있다. 「寧越付邑誌」의 기록에 의하면 『付在上東面梨木里 邑七十里二十聞(동창은 상동면 이목리에 있으며 거리는 영월읍에서 70리가 되고 창고의 크기는 20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동창(東倉)이 있었던 창터 자리는 논과 밭으로 변하였으며, 지금은 그 당시의 기왓장이 발견되고 있을 뿐이다. 더 늦기 전에 표지석을 세워 동창(東倉)의 위치를 밝혀두어야 할 것이다. 이곳의 세곡은 영월의 읍창(邑倉), 하동의 두창(杜倉), 남면 서창(西倉)에 보관된 곡식과 함께 뱃길을 통하여 원주 부론에 있는 흥원창(興原倉)을 거쳐 서울 용산의 경창으로 옮겨졌다. ■ 뱃재 이목리에서 정선군 신동읍 길운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뱃재(梨木里)에서 길운으로 넘는 고개이므로 '뱃재'라 한다. ■ 회골(檜谷) 이목리(梨木里) 서쪽인 31번 국도 좌측에 있는 마을이다. 예부터 이곳에는 큰 전나무(檜木)숲이 있었으므로 '회골→횟골'이라고 한다. ■ 마네골 회골에서 마천교 건너편으로 뻗은 골짜기이다. 옛날 이곳 동굴에서 용마가 나왔는데 주인 장수를 찾지 못하여 울부짖으며 골짜기를 헤매다가 죽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마네골의 유래는 용마가 난 곳이므로 '말난골이→말낸골→마네골'로 변하였다. 이곳에는 말이 태어났다는 '말머리굴'과 장수를 찾으며 울부짖다가 말이 굴러 죽었다는 '구리고개'가 있다. 임진왜란 때 당나라의 장수 이여송은 마네골의 산세가 수려하여 장수가 날 것을 염려하여 산에다 혈을 질렀는데 얼마 전만 해도 그 흔적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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