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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에 가면 행복이 흐른다

역사/문화

지명유래

Home 역사/문화 지명유래
작성일 2017.12.04 , 조회수 1929
역사/문화>지명유래 상세보기 - 읍면구분, 제목, 내용, 파일 정보 제공
읍면구분 영월읍
제목 하송리
내용 하송리

■ 뱀재
병밑골에서 방절리 청령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이 고개가 꼬불꼬불하고 길다고 하여'뱀재'라고 하며 서산재와 연결되어 있다. 그 정상에서는 청령포와 잔다리 일대가 보인다.

■ 서산골
서산 마을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이 골을 지나면 방절리 잔다리와 청령포로 갈 수 있는 서산재로 통한다. 서선재에는 수정과 곱돌이 많이 났었다.

■ 메끝
하송리 기차역을 지나 대왕각이 있는 곳이다. 산(뫼)이 끝나는 곳에 있는 마을이란 뜻으로 예전에는 이곳 기차다리 주위에 여러 가구가 살았으나 지금은 대왕각에서 이장수씨만 살고 있다.

■ 절무리골
서산 마을 서북쪽에 있다. 작은 절이 있으며 이곳 사람들이 식수로 사용하던 맑은 샘이 있다. 즉, 물이 솟아나는 절이 있으므로 '절물이골→절무리골'이라 한다. 이곳을 지나면 영월공전과 뫼끝에 있는 대왕각으로 질러가는 길이 있다.

■ 돌석개
대장개 서쪽 영월공전 밑이다. 서강에서 흐르는 물이 이곳의 넓은 돌광장에서 갯벌을 형성하였으므로 '돌석개'라 한다.

■ 금봉연(金鳳淵)
동강과 서강이 합치는 합수거리에 있다. 강 건너 팔괴 쪽의 검각산 병창 밑에 있는 푸른 소인데 예전에는 명주실 한 꾸리가 다 들어갈 정도로 깊었다고 한다. 이곳에는 용으로 승천할 큰 이무기가 살고 있다는 전설이 있어서 사람들이 접근하기를 두려워하였다. 원래는 하송리에서 태어난 장수가 죽자 주인을 기다리던 큰 칼(劍)이 이곳에서 소리를 내며 울었다고 하여 '검부연'이라 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금봉연(金鳳淵)'이 되었다.

일제 시대 때는 영월소학교(향교에서 수업) 4학년인 엄정훈을 중심으로 한 청년들이 합수거리에 모여 만세운동을 추진하다 발각된 곳이기도 하다.

■ 아기장수무덤
은행나무 서쪽 200m 지점인 하송 1리 노인정 뒤에 있다. 말무덤이라는 이야기와 함께 하송리에 묵지원(墨只院)이 있을 때 말이 죽으면 이곳에다 묻었다고도 한다. 일설에는 하송리에 사는 엄씨 집안에서 아기장수가 태어났는데, 이 소식을 들은 관가에서 장수를 죽인 다음 이곳에다 묻었다는 전설이 있다. 아기장수 탄생 설화는 민중들이 사회에 대한 불만과 한을 나타내는 무언의 저항이었다.

■ 절터
은행나무 서북쪽 100m 근처이다. 예전에 이곳의 집을 뜯을 때 구들장 밑에서 나온 불상 여러 개를 삼태기에 담아서 대장개 우물 뒤쪽 언덕에 묻었다고 한다.

■ 은행나무
하송리에 있는 천연 기념물 76호 영월 엄씨의 시조인 엄임의(嚴林義)가 심었다고 전해진다. 수령은 1200년으로 잡고 있으며, 높이 36m, 둘레가 18m나 되는 동양 최고의 은행나무이다.

이곳 주민들은 이 나무를 신목(神木)으로 소중하게 여기는데 경술국치(한일합방)와 6.25때는 북쪽 가지가 부러지고, 8.15해방 때는 동쪽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등 국가의 슬픔과 기쁨을 예언하였다 한다.

■ 학당골(鶴堂谷)
석정여종고, 영월 교육청이 있는 곳이다. 1516년(중종 11)에 단종의 묘를 성분 하면서 왕릉(王陵)주위에 사가(私家)의 모는 있을 수 없다 하여 영월 엄씨들의 선산이었던 장릉의 모든 묘들이 이전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엄씨들의 많은 묘가(시조부터 10代까지) 실묘되었다. 이때 군기공파의 엄씨 문중에서는 능말 동을지산에 있었던 엄보(11대 증조)의 산소를 이전하려고 묘를 파헤치니 학(鶴) 세 마리가 힘찬 날갯짓을 하며 뛰쳐나와 하송리 학당골의 흰재에 있는 와우형국(臥牛形局)의 묘자리로 날아 왔으므로 이곳을 '학당골'이라고 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 솔모랭이
학당골에 있는 교육청을 지나 방절리로 넘어가는 흰재 언덕에 있다. 지금도 수백 년이 지난 소나무들이 많으며 영월 엄씨의 산소(엄보, 11代)가 있다. 아스팔트 포장이 되기 전에는 이 고개를 넘어가는 사람들의 휴식장소로 이용되었다. 옛 길은 공동묘지 앞으로 지나 다니는 신작로와 흰재가 있었다.

■ 쇠전거리
직행버스터미널이 있는 곳이다. 원래의 위치는 영월초등학교 앞 구 보건소 자리였다. 예전에는 영월 근교의 농민과 소장사들이 이곳에서 소를 사고 팔았으므로 '쇠전거리' 또는 '우시장'이라 했다. 지금의 우시장은 남면 갈골로 옮겼다.

■ 송이골
영월의 안산으로, 보건소가 있는 곳이다. 예전에는 영월 읍내에도 능말처럼 큰 소나무들이 많아서 그 지명을 상송리, 하송리라 하였다. 이곳은 상송리 지역으로 송이버섯이 많이 나서 '송이골'이라 하였다.

■ 송정마을(松亭洞)
예전에 큰 소나무가 많았다. 현재 영월 전신전화국과 경찰서 부근이며 소나무 숲이 있었으므로 '송정개' 또는 '송정마을'이라 하였다.

■ 안산(案山)
영월읍내 맞은편인 하송리에 있는 산으로 영월군청이 있다. 풍수에서는 마을 앞에 있는 산을 '안산'이라 한다.

■ 샛말(間村)
창말(倉洞)과 행정(杏亭) 사이에 있는 마을이므로 '사이마을→샛말'이 되었다. 예전에는 영월시장 상가 쪽인 창말과 하송리 행정사이는 모두가 밭이었고 그 중간위치에 있는 샛말에만 작은 동네가 형성되었다. 현재 샛말슈퍼가 있는 곳이다.

■ 대왕각(大王閣)
단종 대왕의 유배지인 청령포와 강을 사이에 두고 호랑이가 누워 있는 형상의 큰 절벽 위에 있다.

녹전리의 김득해(金得海)라는 분의 딸로 효심이 뛰어났던 김이봉(金二鳳)이 1957년 단종의 영혼을 모시기 위해 건립하였다. 김이봉은 녹전리(錄田里)에서 김득해(金得海)의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오빠와 언니 2명은 어려서 죽고 나머지 언니들은 남편을 따라 만주로 떠나자 그는 어린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늙으신 부모님을 남다른 효심으로 모셨다.

그의 아버지는 어려운 가정을 이끌어 나가면서 틈틈이 빌려 쓴 빚이 점차 늘어나자 화병으로 자리에 눕게 되었다. 온갖 정성을 다하여도 병환에 차도가 없자 열두 살이었던 이봉은 부잣집의 며느리로 간다는 조건으로 70원을 빌려 아버지의 빚을 갚음으로써 부모님의 걱정을 덜어드렸다.

이봉은 이때부터 이웃집에 품을 팔거나 길쌈을 하여 부잣집의 빚을 갚은 후 열 여덟살 대 이종대와 결혼을 하였다. 효녀 이봉이 살았던 녹전에는 태백산 산신령인 단종 대왕의 영정을 모시는 성황당이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딸에게 단종 대왕을 늘 잘 모셔야 한다는 당부를 하면서 성황당을 자주 찾았다.

이봉이 22살 되던 해에 친정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밤마다 꿈에 나타나 "이봉아, 청령포 절벽 위에 사당을 짓고 단종 대왕님을 잘 모셔야 네가 복을 받을 수 있다."라고 현몽을 하였다.

그러나 어린 자식들 때문에 아버지의 현몽을 이행치 못하던 이봉은 결국 원인 모를 병으로 눕게 되어 일어나지 못하였다. 이에 이봉은 대왕각을 건립하고 단종 대왕의 영정을 모시니 그녀의 병은 씻은 듯이 나았다. 그녀는 대왕각에서 생활하면서 문종과 현덕 왕후의 비각을 만들어 대왕각 앞에 모셨다.

이 외에도 효녀 이봉은 단종의 계시로 청령포 경내에서 산삼 열 한 뿌리를 캐내어, 그 중 가장 큰 것을 이시영 부통령에게 보내드렸다. 이에 부통령은 감사의 편지와 함께 분홍색 치마 저고릿감 한 벌을 내려보내었고 집안에서는 이 편지를 가보로 잘 보관하고 있다.

『보내신 글과 자제 분의 말을 들으니, 십여 년간이나 거룩하신 정성을 드려서, 신(神)이 감명으로 얻으신 귀중품을 보내주심을 덕이 없는 이 사람이 받자니 미안하며 감사할 뿐입니다. 자제 분을 통하여 두어 가지 물건을 보내오니 받아 주시기 바라오며 많은 행복 누리시기 비나이다. 족정 이 시 영』

김이봉은 1984년 83세의 나이로 돌아가셨으며, 그의 시신은 대왕각 앞 정원에 묻힘으로서 그는 죽어서까지도 단종의 영혼을 모시게 되었다.


■자료출처:「영월 땅 이름의 뿌리를 찾아서」저자 엄흥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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