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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지명유래

Home 역사/문화 지명유래
작성일 2017.12.04 , 조회수 3103
역사/문화>지명유래 상세보기 - 읍면구분, 제목, 내용, 파일 정보 제공
읍면구분 영월읍
제목 거운리
내용 거운리

■ 용마굴, 용담
거운리에 사는 정씨(丁氏)네 집안에서 아들을 낳았는데, 3일 만에 시렁 위에 올라가서 병정놀이를 하는 등 보통아이와는 달랐다. 집안에서는 역적이 될 것을 두려워하여 작두로 목을 잘라도, 큰 연자방아로 눌러도 죽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아기장수에게 독한 술을 3일 동안 먹이고 잠이 든 후에 겨드랑이 밑에 있는 참새 날개만한 쭉지를 인두로 태워서 죽였다. 그 후 거운 다리 밑의 용마굴에서는 흰 백마가 나와서 만지 쪽으로 뻗은 백말등(산능성이)을 치달리며 3일 동안 울부짖다가 죽었다. 그 무덤은 강 건너 섭사에 있었는데, 1936년, 1972년, 1990년의 대홍수를 겪으면서 없어졌다. 그리고 아기가수의 무덤은 성황당 터 건너편에 있는데, 지금도 장수묘라고 부르고 있다.

■ 딱밭굴
서낭당 터 밑으로 거운리 남쪽 강가에 있다. 백여명이 앉아 놀 수 있는 넓은 굴로 둔덕 위에 있는 밭두렁이 문종이를 만드는 닥나무밭이 있어서 '딱밭굴'이라고 한다. 그 앞에 있는 '딱밭소'에다 닥나무를 담그었다가 가마솥에 푹 삶은 다음 노끈이나 종이를 만들었다.

■ 선바우(立石)
숯검은골 산능성이에 약 5m 정도의 큰 바위와 그 보다 조금 작은 바위가 있어서 '선바우'라 한다. 삼월 삼짓날(3월 3일)이나 사월 초파일(4월 8일)에 인근 마을 사람들이 이 선바우를 찾아가 '산멕이'를 하던 곳이다.

산멕이란 호환(虎患)이 극심하던 옛날에 우리의 조상들이 산의 주인이신 산신(山神, 호랑이)에게 제(祭)를 지내던 토속적인 원시신앙의 한 형태로 토테미즘(Totemism)과 무격신앙(Shamanism)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산멕이는 가족이나 집안단위로 이루어지는데, 삼베나 광복, 색동천 등의 삼멕이 금줄을 바위나 큰 나뭇가지에 걸고, 가지고 간 메와 주과포 등을 차려 놓고 집안의 안녕과 호환의 방지를 기원하는 우리의 전통적인 민간 신앙으로 '산을 모신다.'고도 한다.
지금도 어머니들이 '너는 산에 치성을 드려서 낳은 자식이니 절대로 개고기를 먹어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것도 이 산멕이 신앙으로 득남(得男)을 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옛날에 어느 장수가 이곳에서 무술 연습과 도를 닦았다는 얘기도 전해지고 있다.

■ 도장골
장화동 서쪽골짜기에 있다. 옛날 산에다 불을 질러 나무를 태우고 밭을 일구어 먹던 화전민(火田民)들이 가을에 잡곡을 추수하여 보관하던 도장(창고)이 있었으므로 '도장골'이라고 불렀다는 얘기가 있다. 그러나 도장골이라는 지명의 마을은 모두가 깊은 산골짜기 안에 있다. 즉, '달(산)안골이→돋안골→도잔골→도장골'로 변하였다. 이곳을 지나면 북면 마차리로 갈 수 있다.
도장골 북쪽에는 화전민들이 일구어 먹던 사슬밭(여러 곳으로 나누어져 있는 밭)이 많이 있었다.

■ 두무치(斗茂峙)
장화동 북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사슬골을 지나서 가는데 도장골과 꽃밭양지를 거쳐서 갈 수 도 있다.
전에는 3가구가 살았으나 지금은 폐촌이 되었으며, 지명의 유래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둠)산골 마을이므로 '둠+실→두무실→두무치'라고 불렀다.

■ 사슬골
거운리에서 문산리로 넘어가는 절운재 좌측이 사슬골로 가는 입구이다. 산세가 험악하며, 도장골과 장화동 사람들이 이곳에서 화전(火田)을 일구었다. 화전이 한 버덩으로 붙어있지 않고 여기 저기 떨어져 있었으므로, '사슬밭'이라고 하는데, 이 골짜기에 사슬밭이 있었으므로 '사슬밭골' 또는 '사슬골'이라고 한다.

■ 장화동(長花洞)
절운재 밑으로 길게 뻗은 마을로 봄철에 들꽃이 많이 피어나므로 '장화동'이라 한다.

■ 당두둑
장화동의 이앗벌 남쪽으로 언덕 위에 서낭당(城皇堂)이 있다. 당두둑에는 커다란 버드나무 숲이 우거져 있고 맑은 샘이 솟아 거운리 사람들의 식수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또한 당두둑의 숲 밑에는 물이 고이는 소(沼)가 있는데 예전에 어떤 무당이 이곳에서 굿을 하다가 산신령의 노여움으로 살(煞)을 맞아 소(沼)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지명의 유래는 당(堂)이 있는 둔덕이므로 '당두둑'이고 무당이 죽은 소(沼)는 '무당소'라고 한다.

■ 소금실
당두둑 앞에 있다. 소금이 귀하던 시절 소금 장수가 이곳에 주막을 정해놓고 소금을 팔았던 마을이라 하여 '소금실'이라고 한다. '실'이란 '마을'을 뜻하는 고어이다.

■ 느릅재
본골과 작은마차 사이에 있는 고개이다. 거운리 사람들이 본골을 지나고 이 느릅재를 넘어서 마차와 문산리의 팔운(八雲)으로 다녔다. 이 고개의 중턱에는 활엽수로 여름에 둥근 꽃을 피우는 느릅나무가 많아서 '느릅재'라고 한다.

■ 마차(磨磋)
거운리의 본동(本洞)인 중말에서 느릅재를 넘으면 작은마차와 큰마차가 있다. 이곳은 옛날 연자매, 맷돌 등 돌로 된 물건들을 만들었던 곳이므로 '마차(磨磋)'라는 지명이 생겼다.
현재 삼옥리(三玉里) 먹골의 평창 이씨 열녀각 앞에 남아 있는 연자매와 섭사에서 4H 표시판으로 사용되는 연자매도 이곳에서 만들었다. 또한 큰마차에서 강을 건너고 노루목재를 넘으면 문산리(文山里)의 팔운으로 갈 수 있으며, 큰마차에는 인가(人家)가 없고, 작은마차에는 5가구가 살고 있다.

■ 조청도굴
거운리 동남쪽인 섭사 건너편 언덕 위에 있는 굴이다. 길이는 50m정도, 입구는 30°정도의 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내부로 들어가면 3개의 굴로 나누어진다. 동굴 중간에는 물과 종유석이 있으며, 예전에 난리가 나면 이곳에서 피난을 하였다고 한다. 박쥐와 같은 새들이 많았으므로 '조청도굴'이라 한다.

■ 만지(滿池)
마차(磨磋) 동남쪽에 있는 작은 마을로 현재 3가구가 살고 있다. 그 지명이 '가득찰 滿', 못 池'로서 언제인가는 이 마을 전체가 연못에 될 것이라고 내다 본 예언성지명(豫言性地名)이다.
1972년과 1990년에 영월 지방에 큰 홍수 피해가 있었다. 이때, 충주 댐만으로는 홍수조절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판단한 정부에서는 오는 2000년까지 높이 98m, 길이 18m, 저수용량 6억 5만톤 규모의 댐을 백룡동굴(천연기념물 260호) 10km 하류인 만지(滿池)에다 건설할 것을 결정했다.

수자원 공사의 타당성 조사가 끝났으며, 정선 주민들의 반대도 있지만 댐이 완성될 경우 이 마을은 수몰되어 물이 가득찬 연못(滿池)이 될 것이다. 맑은 물과 깎아지른 어라연(魚羅淵) 절벽의 노송사이에는 고기들이 놀고, 사시사철 푸르름을 자랑하는 심산계곡인 어선골(魚船谷)도 남한강의 푸른 물길에 잠겨서 그 위로는 고깃배들의 그림자가 드리워질 것이다.
섭사(涉砂) 또한 댐공사로 많은 모랫더미가 쌓일 것이니 먼 훗날을 예견하고 지명(地名)을 만든 우리 조상들의 슬기에 감탄할 뿐이다.

■ 만지 나루터
만지에서 길운으로 건너가는 나루터이다. 지금도 만지나루터에는 뗏꾼들을 상대로 술장사를 했다는 전산옥의 집터와 돌담이 그대로 남아있다. 정선 조양강에서 내려오는 골뗏꾼들을 상대로 주막집을 운영하던 그의 집은 1936년 병자년 가력으로 떠내려갔다. 지금 그가 살던 집터는 무성한 잡초와 흩어진 돌담만이 뒹굴고 있다.

■ 어라연(魚羅淵)
거운리(巨雲里) 동쪽인 만지나루터 위에 있다. 옥순봉(玉筍峰)을 중심으로 세 개의 봉우리 (三仙岩)가 푸른 물속에 진주처럼 틀어박혀 있고 기암절벽 사이로 솟아난 소나무들은 계곡의 맑은 물소리와 어우러져 마치 한 폭의 수목화를 감상하는 느낌마저 주는 곳이다.

옛날 이곳에 어라사(於羅寺)라는 절이 있었으므로 '어라연'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지금도 그곳을 절터라고 하는데 근래에는 수운암(水雲庵)이 있었다. 영월에서 약 35리 정도의 거리로 길이 험하고 고기가 많으며 여름철에는 넓게 펼쳐진 백사장과 강 가운데 있는 커다란 너럭바위를 찾는 천렵꾼들이 많다.
1530년(중종 25년)에 간행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다음과 같은 얘기가 기록되어 있다.

어라사연은 영월군의 동쪽 거산리에 있다. 세종 13년에
이곳에 큰 뱀이 있었는데, 어떤 때는 연못에서 뛰어 놀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물가를 꿈틀거리며 기어다니기도 하였다.
하루는 물가의 돌무더기 위에 허물을 벗어놓았는데
그 길이가 수십 척이고 비늘은 동전만하고 두 귀가 있었다.
이곳 사람들이 비늘을 주워 조정에 보고하였으므로
나라에서는 권극화(權克和)를 보내어 알아보게 하였다.

극화가 연못 한가운데에 배를 띄우니 폭풍(暴風)이
갑자기 일어나면서 그 자취를 찾을 수 없었다.
그 후부터는 뱀도 또한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원지명은 於羅淵이었으나 후에 魚羅淵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 자료출처:「영월 땅 이름의 뿌리를 찾아서」저자 엄흥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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