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읍면구분 | 남면 |
|---|---|
| 제목 | 광천리 |
| 내용 |
광천리
■ 검각산(劍閣山) 광천리와 남면 연당 사이로 각한치(角汗峙)라는 높은 고개가 있으며, 하얀 눈송이가 덮힌 이곳의 낙락장송은 '검각창송(劍閣蒼松)'이라 하여 영월 8경(寧越八景) 가운데 하나로 유명한 곳이다. 산봉우리가 각이 지고 칼처럼 생겼다고하여 '검각산'이라 한다. 일설에는 영월 엄씨의 시조인 엄임의(嚴林義)가 당(唐)나라의 사신인 파락사(坡樂使)로 신라에 와서 귀화하였다. 엄임의는 奈城郡으로 봉해진 후 영월을 식읍으로 받았다. 그가 영월로 부임할 때 각한치를 넘어오면서 이곳의 산세가 중국 중경(重慶)에 있는 검각산과 닮았으므로 '검각산'이라고 불렀다 한다. ■ 학관의 묘등 뒷다랭이골과 푯대봉 사이에 있는 큰 묘이다. 예전에 조전리에서 한의원을 하며 큰 부자로 살았던 엄학관의 묘가 이곳 등날에 있었으므로 '학관이 묘등'이라 한다. ■ 각한치 마방터 방절리 서강에서 잠수교를 지나 굴골과 각한치로 갈라지는 철길 밑에 있는 밭을 '마방터'라 부르고 있다. 옛날 각한치에는 마굿간을 갖추어 놓고 술과 음식을 파는 마방집이 있어 오고 가는 행인이나 소장수들이 늘 쉬어가곤 하였다. 이 각한치를 넘어 다니며 소장수를 하여 많은 돈을 번 사람들 중에 상처(喪妻)를 한 뒤 오직 외아들 하나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소장수 한 사람이 있었다. 이 소장수는 소중하게 키운 외아들을 장가들여 며느리와 함께 살고 있었으나 불행하게도 결혼한 지 몇 달만에 외아들이 시름시름 앓더니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 늙은 소장수에게는 너무나 허망하고 슬픈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돗자리 메는 일을 소일 삼아서 청상과부가 되어버린 며느리와 함께 하루 하루를 살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이웃집 큰 일에 갔던 며느리가 막걸리와 적(부침)을 가지고 와서는 "아버님!, 목마르실 텐데 시원한 약주나 한 잔 드시고 일을 하세요"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며느리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시아버지는 "젊디젊은 것이 무슨 죄가 있어서 청상이 되어 이 고생을 할까. 내가 몹쓸 사람이니 나 혼자 사는 게 힘들어도 하루빨리 개가를 시켜야 할 텐데."하면서 걱정을 하였다. 이윽고 며느리가 빨래뭉치를 들고 냇가로 나간 뒤 막걸리를 사기 그릇에 가득히 부은 후 막 마시려고 하는데 갑자기 대청마루 위로 제비 한 마리가 날아가면서 막걸리 잔에다 똥을 싸고 가는 것이었다. 시아버지는 더러운 술잔을 흔들어서 땅에다 쏟아 버렸는데 그때 봉당에서 놀던 개가 그 막걸리를 핥아먹고는 빙빙 돌더니 잠시 후에 죽어 넘어져 버렸다. 깜짝 놀란 시아버지가 일의 앞뒤를 헤아려 보니 그 주전자에는 독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시아버지는 며느리의 행위가 괘씸하여 관가에 알리려다가 "평소에 그렇게도 착했던 며느리가 얼마나 혼자 살기 힘들었으면 이다지도 끔찍한 일을 생각했겠는가, 모두가 내 탓이지"라며 시름에 잠겨 버렸다. 이때 삽작문을 열고 살그머니 들어오던 며느리는 봉당에 죽어있는 개와 묵묵히 앉아 있는 시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멍하니 앉아 있는 시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아버님!, 이 몹쓸것을 죽여주십시오. 감히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아버님께 험악한 일을 저지르려 한 이년을 죽여주십시오."라면서 목을 놓아 통곡을 하는 것이었다. 며느리의 한 맺힌 울음소리를 듣던 시아버지는 "아가야!, 내가 진작 너를 친정으로 돌려보내 개가를 시키려고는 했으나 지극한 정성으로 이 늙은 것을 공경하는 너를 차마 보낼 수가 없었다. 모든게 이 늙은이의 잘못이니 네가 이 시아비를 용서하려무나." 하면서 오히려 그 며느리를 달래주었다. 그후 시아버지는 평생동안 모아 온 재산을 정리하여 며느리를 개가시키면서 먹고 살 집과 얼마간의 농토까지 마련해 주었다. 그런 후 며느리의 간곡한 호소를 뒤로하고 괴나리봇짐에 전대만 차고 정처 없는 유랑의 길에 올랐다. 전국의 이름난 명승지를 몇 달 돌아다니다 보니 얼마 되지 않던 노자는 금방 바닥이 나고 말았다. 이 시아버지는 할 수 없이 며느리가 사는 집을 찾아갔지만 차마 집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한 채 , 젊어서 소장사를 다니던 강원도 땅이나 한번 가보고 죽자는 각오로 양연(연당)을 지나 험한 각한치를 오르다가 그만 쓰러져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을까, 어렴풋이 눈을 뜨니 웬 젊은이가 옆에서 극진히 간호를 하고 있었다. "젊은이, 고맙네. 이 늙은이를 구해 준 은혜를 어떻게 갚을지 모르겠네. 가진 것이 없으니, 마음속으로 나마 훌륭한 젊은이가 되기를 빌어 주겠네. 라는 늙은 소장수의 말에 젊은이는 걱정 말고 빨리 몸이나 완쾌되라고 위로를 하는 것이었다. 이때 방문이 열리고 한 노파가 들어오더니 의식을 차린 소장수 영감을 보고는 눈시울을 적시는 것이었다. "영감님! 영감님이 젊었을 때 이 각한치 고개를 넘어다니며 소장사를 하셨지요? 그 당시에 이곳 마방집에서 밥을 해 주는 노처녀를 소여물을 쌓아 놓은 깍지간에서 건드리지 않았소? 그 노처녀가 바로 이몸이고 그때 낳은 자식이 바로 이 아이입니다. 당신이 언젠가는 꼭 이곳을 지나갈 줄 믿고 평생을 이 마방집을 지키면서 기다리고 있었오." 이러한 노파의 말을 들은 소장수 영감은 꿈같은 현실에 넋이 빠졌다가 이윽고 부인과 아들의 손을 꼭 잡은 채 눈물만 줄줄 흘렸다. 소장수 영감이 새로 찾은 부인과 아들의 청을 받아들여 각한치의 마방집에 눌러 살게 된 얼마 후, 시아버지가 거지꼴을 한 채 자기가 사는 마을을 거쳐갔다는 소문을 들은 며느리가 남편과 함께 수소문 끝에 시아버지를 찾아 각한치 고개까지 와서는 노후에 편안히 살만큼의 토지를 마련해 주고 돌아갔다. 그후 소장수 영감은 이곳 각한치의 마방집에서 편안한 여생을 보냈다는 이야기가 이곳 후진포 마을에 전해지고 있다. ■ 각한치(角汗峙) 영월읍 방절리 서강(후진나루터)에서 잠수교 건너편인 광천리에 있다. 이 고개는 남면 연당으로 넘어가는 높은 고개로 예전에는 제천 시장으로 가는 장사꾼들이 이 길을 이용하였다. 얼마 전만 해도 각한치 고갯마루에는 돌무더기(돌탑)옆에 느티나무인 큰 신목과 서낭당이 있었다. 각한재를 넘는 상인이나 행인들은 이곳에 돌탑을 쌓고 마을의 풍년과 여생의 안녕을 기원하였다. 서강 나루터의 배를 건널 때는 고사전(告祀錢)이라는 돈을 추렴하여 매년 음력 2월에 서낭신(城隍神)에게 제사를 지낸 후에 뱃전에다 실을 감고 삼색실과와 술을 준비하여 용왕신(龍王神)에게 고사를 올리는 풍습이 있었다. 각한치재의 유래는 예전부터 이 고개로 소장사들이 소를 몰고 넘어 다녔는데 그 고개가 너무 험하여 소뿔에 땀이 날 정도였으므로 '각한치'라고 하였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도 각한치라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역사가 깊은 곳으로 마방집에 얽힌 전설도 전해지고 있다. 각한치 서낭당은 1973년 새마을 운동 때 관청에 의해서 불태워졌다. 지금 각한치재는 일제 때 다시 만들어진 것이고 원래의 고개는 '옛각한치'라 하여 위다랭이골, 위쪽 계곡 옆으로 길이 있었다. ■ 윗다랭이골 서강의 검각산 우측 줄기로 수만평의 넓은 밭다랭이가 각한치의 기차굴까지 이어졌다. 큰 밤나무가 많은데 이 산에서 나는 물은 강 건너인 방절리 서강 사람들의 식수원으로 이용된다. 그 아래에 있는 넓은 밭다랭이를 '아랫다랭이골'이라 한다. ■ 서강나루터 남면 광천리와 영월읍 방절리 서강사이로 흐르는 강이다. 그 앞은 '뱃터거리'마을로 예전에는 음력 2월 영등할머니가 오신 날에 뱃고사를 올렸다고 한다. '나루'는 '강이나 내와 같이 흘러내리는 물'을 뜻한다. ■ 본골(본마을) 광천리 마을 회관이 있는 곳이다. 광천리(굴골)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마을이므로 '본말'이라고 한다. ■ 어이재 광천리에서 청령포 칼산 뒤쪽을 지나 팔계와 흥월리로 가는 고개이다. '어이'는 '위, 꼭대기'의 뜻으로 산등을 넘어간다고 하여 '어이재'라는 지명이 생겼다. ■ 무랑골(水沆洞) 서강의 배터거리에서 광천리로 들어가는 좌측 첫 번째 골이다. 50m 정도의 높은 벼랑 밑으로 크고 깊은 골짜기가 뻗었는데 이곳에서 많은 물이 흘러나오므로 '물안골→무랑골' 또는 '수항동(水沆洞)'이라 한다. ■ 매화동(뫼둔골) 본말 남쪽에 있는 골이다.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면 좌측으로 10여 마지기의 다락논이 있으며 숲 사이로는 맑은 개울물이 흐른다. 지금은 2가구가 살고 있는데, 옛날 절이 있었다는 두 번째 집인 진두만 씨네 뒤안에는 차고 맑은 샘이 바위 속에서 솟아난다. 그 뒷산인 국지산에는 T.V무선중계소가 있다. 국지산의 뫼둔지로 올라가는 골짜기이므로 '뫼둔골'이라고 하며 일설에는 묘가 많아서 '뫼동골'이라고 했는데 그 후 어감이 좋지 않아서 '매화동(梅花洞)'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 장승백이 국지골과 돌고개로 갈라지는 버스 종점 부근이다. 옛날 『天下大將軍, 地下女將軍』이라고 쓰여진 두 개의 큰 장승이 서 있었던 곳으로 장승은 길손들의 이정표와 쉼터 역할을 했으며, 우리 조상들은 민속신앙의 대상으로 숭배하기도 하였다. ■ 국지골 매화동 입구에서 남향으로 길게 뻗은 골짜기이다. 조전리, 흥월리, 광천리로 이어지는 해발 625.6m의 웅장한 국지산 자락에 묻혀 있어서 '국지골'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2가구가 살고 있다. ■ 자작이골 매화동과 국지골 입구를 지나 자작나무가 많은 자작이재 밑에 있으므로 '자작이골'이라 한다. 이곳을 지나면 흥월리의 뒷골을 거쳐 다릿말(달이말)로 간다. ■ 솔안이골(松內谷) 너분골 입구에서 좌측으로 올라가는 골이다. 길게 뻗은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약초를 캐는 집이 살고 있으며, 옛날 이곳은 산판을 하기 전에는 푸른 소나무들이 무성하여 '솔안이골'이라 하였다. '솔안이골'은 '소나무안에 있는골→솔안이 골→소라니골'로 그 어원이 변하였다. 이 골짜기를 지나면 조전리의 오락동으로 간다. ■ 장수혈터 본 마을의 서낭당 뒷산 봉우리에 있다. 광천리는 국지산 자락에 자리한 마을로 산수가 수려하여 옛부터 큰 인물이 난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임진왜란때 명(明)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이 이곳에 큰 쇠못을 박아 장수의 혈(血)을 끊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돌고개에 사는 엄동석(嚴東錫, 63세)씨가 30cm정도의 쇠못을 뽑았다고 한다. ■ 자료출처:「영월 땅 이름의 뿌리를 찾아서」저자 엄흥용 |
| 파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