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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면 지명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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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7.12.04 , 조회수 1484
역사/문화>지명유래 상세보기 - 읍면구분, 제목, 내용, 파일 정보 제공
읍면구분 북면
제목 연덕리
내용 ■ 연덕리(延德里)
1914년 일제(日帝)의 조선총독부령의 의해 북면이라 칭하게 되었고, 연평(延平)의 '연'자와 덕하(德下)의 '덕'자를 따서 '연덕리(延德里)'라 하였다. 연평리는 예전부터 북면의 중심지로 땅이 기름지고 농사가 잘되었으며, 자연부락으로는 가람마을, 나산이, 성황동, 달앗, 사만이, 오만이 등이 있고, 2개 행정리에 192가구 698명의 인구가 벼, 옥수수, 콩, 팥, 녹두, 고추, 담배 등 밭농사에 종사하고 있다. 성황동 입구에는 삼강레미콘 공장이 있고 연평에는 보건지소, 노인정 등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보안도(保安道) 소속의 '연평역(延平驛)'이 있어서 고덕치의원동을 지나 평창 약수리의 '약수역(藥水驛), 방림역(方林驛), 대화역(大和驛)'으로 갈 수 있었다.

■ 연평(延坪)
연덕리(延德里)의 중심이 되는 마을로 연덕초등학교, 연덕보건지소 등이 있다. 조선말기까지 이곳에는 연평역(延平驛)이 있었으므로 '연평'이라 한다. 역(驛)은 중앙 관청의 공문이나 관리들의 출장시 말(馬四)을 공급해 주던 교통의 중심지에 설치하였으며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군으로부터 북쪽 40리에 있으며 대마(大馬) 1필, 기마(騎馬) 1필, 짐을 실어나르는 복마(卜馬) 1필 역리(驛吏) 14명, 노(奴) 15명』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영월부읍지(寧越付邑誌)」에는 『延平驛在 距四十里 大馬二四卜馬一四 吏十四人 奴十五名 婢五名』으로 기록되어 있다. 즉, 대마(大馬)의 1필이 늘어난 대신에 기마(騎馬) 2필은 줄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역에는 7월에 말 2마리를 받아가지고 사용하다가 다음해 3월에 국가에 상납하였다.

영월과 평창의 경계인 고덕치 밑에는 관리다 행인들에게 숙식(宿食)을 제공하던 원(院)이 있었으므로 「영월부읍지」에 『延平院在付北 距四十里大間』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도 그곳의 지명을 원동이라고 하고 구비가 심한 이고개를 '원동재'라 한다. 영월의 新興驛, 楊淵驛, 延平驛과 평창의 藥水驛, 方林驛, 大和驛, 정선의 餘粮驛, 臨溪驛, 원주의 安興驛, 丹丘驛, 神林驛 등 29개의 역(驛)은 참하찰방(參下察訪)이 다스리는 보안도(保安道)의 통치를 받았다.

■ 장터거리
연평의 보건지소 부근으로 북면의 중심지였으나 일제 때인 1919년에 모든 행정기관이 문곡리로 옮겨졌다. 이곳은 연평이 북면의 면 소재지 일 때 시장(市場)이 번성했으므로 '장터거리'라 하였다.

■ 용바위(龍岩)
연평 마을회관의 동쪽에 있다. 예전에 마을 앞 큰 병창 밑에서 두 마리의 용이 하늘로 승천하려고 싸우다가 이긴 용은 하늘로 오르고 패한 용은 급한 나머지 머리만 남기고 도망을 갔는데 그때 떨어진 것이 지금의 용머리 형태인 '용바위'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 가람말
연덕초등학교 북쪽에 있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로 도로 옆에 송어장이 있다. 예전에 이곳에는 큰 가랍나무(떡갈나무, 도토리나무)가 있었으므로 '가랍마을→가람말'이라고 하였다. 영월읍 문산리에는 한자식 표기법을 쓰는 가정동(柯亭洞)이라는 마을이 있으나 이곳은 '가람말'이라는 순수한 우리말 지명을 그대로 쓰고 있는 곳이다.

■ 나산이
연덕리의 가랍말에서 공기로 가는 도로 변에 있다.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 폐촌으로 학(鶴) 형상의 결박산 줄기가 들판을 감싸고 있으므로 '나산(羅山)이'라고 한다.

옛날 나산이에 큰 부자가 살았는데 밤낮으로 많은 손님이 찾아들었다. 손님치르기에 지친 주인 마님은 유명한 점쟁이를 찾아가 손님이 오지 않는 비방을 부탁드렸더니

"집 뒤에 있는 학(鶴)산을 결박산이라고 부르고 그 산에다 일꾼들을 시켜서 칡넝쿨 수천개를 심으라"라고 말하였다.

그 비법은 결국 칡넝쿨을 심어 학(鶴)을 묶어 맨 결과를 가져와 그 부잣집은 도둑이 들고 큰 화재를 입어 몇 년만에 망해버리고 손님들의 발자취는 자연히 끊겨버렸다고 한다.

■ 노적봉(露積峰)
돌서덕 북쪽인 연덕상교(延德上橋) 북서쪽에 있으며, 그 모양이 추수 후들녘에 쌓아둔 노적가리와 같다고 하여 '노적봉'이라고 부른다. 6.25사변 때 격전지로도 유명한 곳이다.

■ 산영월(山迎月)
노적봉 앞의 연덕상교(上橋)를 지나 원동재 밑 서남족에 있는 마을로 예전에는 두 가구가 살았으나 지금은 폐촌이 되었다. 이곳은 산간 지방으로 정월 대보름 저녁에 마을 살암들이 솔가지에다 횃불을 켜 들고 산에 올라 달맞이를 했던 곳이므로 '산영월(山迎月)'이라고 한다. 또한 달뜨는 것을 먼저 본 사람은 그해에 소원 성취하고 달빛이 붉으면 가물고, 희면 장마가 질 것이라고 믿었다.

■ 선바우(立石)
산영월(山迎月)을 지나 덕상리 청룡 안으로 가는 경계에 있는데, 채독(싸리나무로 독처럼 만든 다음 한지로 바른 단지모양의 그릇)모양의 큰 바위가 마주보고 서 있으므로 '선바우'라고 한다. 이곳은 경치가 아름답고, 맑은 샘이 솟아나며 예전에는 절이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은 '선바우절'이라고 불렀다.

■ 원동재(院洞峙)
북면 연덕리에서 평창읍 마지리(馬池里)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31번 국도로 자동차 학원의 'S자 코스'와 'T자 코스'같은 험한 구비의 고개이다. 원동재 정상에는 간이 휴게소 두 곳이 있으며 그곳에서 서남쪽으로 빠지면 덕상리(德上里)의 원동(院洞)이며, 북쪽으로 가면 평창군과의 경계인 고덕치재가 있다. 옛날 원동재와 고덕치 사이인 원동 마을에 제덕원(濟德院)이라는 원집이 있었으므로 이 고개를 '원동재'라 한다.

■ 성황동(城隍洞)
달앗 동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기름진 농토가 많으며 동네 가운데서 서당이 있으므로 '성황동'이라 한다. 국도에서 이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 삼강레미콘 공장이 있다.

■ 연덕저수지
연덕이 성황동 뒤쪽에 있는 연못으로 둘레 95cm, 높이 6.5m, 저수량 12,000톤으로 이 마을의 농업 용수로 이용되고 있는데 지금은 향어를 키우고 있다.

■ 꽃병굴
성황동 남쪽 산등성이에 있는 굴이다. 들어가는 입구가 좁고 그 내부는 교실 크기 정도의 넓은 굴이므로 '꽃병굴'이라 한다. 6.25사변 때 마을 사람들이 이곳에서 피난을 했으므로 일명 '피난굴'이라고도 하는데 종유석과 석순이 많다.

■ 가래골(楸子洞)
성황동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 마을로 이곳을 지나면 공기리(恭基里)의 너다리골과 지소덕으로 갈 수있다. 예전에 큰 그래나무(추자나무)가 있었으므로 '가래골'이라고 한다.

■ 가는골
가래골 남쪽으로 뻗은 가늘고 긴 골짜기이므로 '가는골'이라 한다. 이곳에는 한국유리 석회석광산이 있으며 이 골짜기를 거쳐 도장골을 지나면 문곡리이다.

■ 사만이(사만동)
문곡 삼거리와 오만이를 지나 연덕천 서쪽 활구지(弓谷山) 밑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 어느 풍수쟁이가 이곳은 4만명의 군사가 몸을 숨길 수 있는 곳이므로 '사만이'라 불렀다는 전설이 있다. 일설에는 조선말 북면의 중심지인 연평역(延坪驛)에서 사마장 정도의 거리에 있으므로 '사만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계곡 끝에는 지하수를 이용한 송어양식장이 있다.

■ 덕장골
큰골에서 서북쪽으로 갈라져 나온 골이다. 이곳을 지나면 덕상리(德上里)의 윗덕전이로 가는 산길이 있는데 예전에 사만이 사람들이 이곳에다 큰 덫을 설치하여 짐승을 사냥했던 곳으로 '덫이→덕'으로 변하여 '덕장골'이라는 지명이 붙었다. 일설에는 큰덕(언덕)으로 올라가는 골짜기이므로 '덕장골'이라고 했다는 얘기도 있다.

■ 오만이(오만동)
사만이와 문곡삼거리 사이로 연덕천 서쪽에 있다. 달앗의 집바디에 있는 호라구지(弓谷山)와연관되어 능히 5만의 군사가 머물 수 있는 곳이므로 '오만이'라고 불렀다는 전설이 있다.

그러나 '사만이'는 연덕에서 사마장, 오만이는 오마장쯤에 위치한 마을이므로 '오만이'라 하고 가느골 앞의 구만이는 구마장 정도의 거리가 되므로 '구만이'라 불렀다는 얘기도 있다. 마을 어귀에는 서낭당과 당숲이 우거져 있는데 이는 밖에서 마을이 들여다보이는 풍수적 결함을 보완하기 위하여 당집과 당숲을 지금의 위치에다 만들었다. 예전에는 윗오마니에서 경사가 심한 둔치재를 넘어 덕상 2리인 윗덕전이로 가는 길목이기도 하였다.

■ 토방골(土房谷)
아랫오마니에 있다. 예전에 화전민들이 통나무로 집을 지은 후 흙으로 벽과 봉당을 만들었던 토방집이 있어서 '토방집골→토방골'이라 하였다. 그리고 겨울 철에는 추위를 이기기 위해 짚이나 억새를 엮어서 가옥 전체를 둘러친 후 한겨울을 지냈다.

■ 자료출처:「영월 땅 이름의 뿌리를 찾아서」저자 엄흥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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