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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면 지명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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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7.12.04 , 조회수 1737
역사/문화>지명유래 상세보기 - 읍면구분, 제목, 내용, 파일 정보 제공
읍면구분 북면
제목 문곡리
내용 문곡리

■ 문곡리(文谷里)
영월군 북면 지역으로 이곳 역시 1914년 일제의 행정 구역 조정으로 문포(文浦, 개간이)와 가느골(細谷里)에서 한자씩을 따서 '문곡리'라 했는데 문포는 일제시대(1919∼1945)북면의 면소재지였다. 행정 4개리에 27가구 1,007명이 논농사와 콩, 옥수수, 고추, 담배 등의 밭농사에 종사하고 있으며, 가느골, 노루골, 장승백이, 강구, 점골, 가래실, 띠앗, 문성개, 두목 등의 자연부락이 있다. 문곡리는 1935년 11월 1일 세곡리, 모상리, 모하리를 병합하였다. 특히, 가느골에 있는 송어장은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는데 이곳 음곡천(陰谷泉)에서 나오는 물은 가느골과 강구의 농업용수로 이용되고 있다.

■ 개간이(開澗)
31번 국도에서 영월, 평창, 정선으로 갈라지는 삼거리로 일명 '문포' 또는 '문곡삼거리'라고 하는데 일제시대(日帝時代)에는 이곳이 면(面)소재지였다. 지금의 농협분소 자리에 지서가 있었고 그 밑에는 면사무소가 있었으나 해방후 마차 광업소의 번성과 더불어 벌마차로 면소재지를 옮겼다. '개간이'라는 지명의 유래는 연덕천(延德川)과 마차천(磨嗟川)이 합쳐지는 냇물 사이에 있으므로 '개+사이→개간이'라고 하였다.

■ 양지 마을
31번 국도 좌측인 양지쪽에 형성된 마을로 농협분소와 농협 고춧가루공장이 있는 곳이다. 일명 '양지뜸'이라고 하는데 '뜸'은 본마을에서 떨어진 곳으로 여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곳을 이르는 말이다.

■ 음지마을
양지 마을의 건너편 산기슭에 자리잡은 마을로 햇볕이 잘 들지 않는다. 개간이 서낭당이 이곳에 있었는데 1975년 새마을운동 때 서낭당을 불태워버리자 갑자기 소가 죽는 등 마을에서는 많은 피해가 잇달았다고 한다. 일명 '음지뜸'이라 한다.

■ 울병들
문곡초등학교 뒤에 있는 넓은 버덩이다. 뒤에 큰 병창이 있어 소리를 지르면 메아리가 되어 다시 돌아온다고 하여 '울병들'이라는 지명이 생겼다.

■ 도로소
문곡천이 흐르는 31번 국도 밑에 있는 깊은 웅덩이므로 '도로소'라 한다. 그 앞에는 문곡 송어장으로 물이 스며들도록 하기 위해서 쌓은 보(洑)가 있다. 연덕천은 지질이 석회석과 사질토이므로 물이 지하로 스며들어 큰 수맥(水脈)이 형성되며 가느골의 음극천으로 분출되어 나온다.

■ 범바우(虎岩)
도로소 건너편의 병창으로 호랑이가 입을 벌린 형상의 '범바우'가 있다. 그 앞의 큰 너럭 바위에는 개발자국과 '개바위' 그리고 지네바위, 뱀바위 등의 큰 바우가 있다. 마차 광업소의 광부를 물어간 호랑이는 광부들이 문암사에서 제사를 지낸 후부터 가끔씩 이곳에 나타났으나 사람을 해치지는 않았다고 한다.

■ 가느골(細谷)
강구에서 개간이로 가는 옛길이 넓은 들녘사이로 가늘고 길게 뻗어있으므로 '가는골→가느골'이라 했으며 일설에는 연평역(延坪繹)과 평창, 진부 그리고 마차와 정선으로 갈라지는 문곡 삼거리로 가는 골이므로 '가는골→가느골'이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문곡 2리로 마을 전체가 정남향이며 사시사철 풍부한 지하수를 이용한 송어양식장(1970년 박경원(朴敬遠) 강원도 지사가 설립)이 영월군에서는 제일 먼저 만들어졌다. 또한, 1982년에는 가느골의 논 56ha가 경지 정리를 끝내고 지금은 기계화 영농으로 미질(米質)이 좋으며 수확량도 증가되고 있다.

■ 솟대백이
가느골의 숲거리 서낭당과 31번 국도 사이 구길에 있었다. 솟대의 유래는 삼한시대(三韓時代)의 신성 불가침 지역인 소도(蘇塗)에서 시작되었으며 긴나무 막대 위에 오리 모양의 새를 조각하여 앉혀놓은 것이다. 옛날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마을에서 나오면 동구밖에다 붉은 장대 위에 푸른 나무로 용을 새긴 '용머리 솟대'를 세웠다.

가느골에는 오리솟대를 세웠는데 볍씨를 주머니에 넣어서 함께 메달아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였다. 이곳의 솟대는 지금으로부터 90여년전에도 있었으나 신작로가 나면서 없어졌다. 솟대의 재료는 비바람에 강한 15자 정도(4∼5m)의 소나무, 낙엽송 등으로 만들어졌으며 그 수명이 다하면 마을 사람들이 솟대 당고사를 지낼 때 만들어 세웠다. 영월향토사연구회(회장 엉흥용) 회원 20여명은 1995년 2월 5일에 마을 주민들과 함께 솟대를 복원한 후 솟대제를 올리고 표지석을 세웠다.

■ 덕고개
가느골 북쪽에 있는 언덕이다. 덕고개 뒤에는 석회암 침식으로 인한 3천여평의 시굿밭이 있다. 예전에 돌림병이 돌아 마을에 환자가 생기면 이곳에다 덕(나뭇가지 사이에 걸쳐 맨 시렁)을 만들어 환자들을 격리 수용하였으므로 '덕고개'라 한다.

덕고개 남서쪽인 마을 회관앞에 사는 임달식 씨는 1980년 담장을 고치다 연화 무늬 받침이 있는 금동불상을 발굴한 후 문화재 관리국에 신고하여 330만원의 보상금을 받은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옛날 이곳에 큰 사찰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임달식씨 말에 의하면 불상의 크기는 20cm, 무게는 2근으로 밤에는 서광이 비쳤다고 하는데 지금은 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 구만이
가느골 서쪽 개울 건너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옛날 북면의 중심지는 연평역(延平驛)이 있었던 연덕리(延德里)였으며, 일제시대에는 개간이였고, 해방후에는 마차리가 되었다. 옛날에는 모든 거리를 리(里)나 마장으로 표시했는데, 북면의 중심지인 언덕에서 사만이까지는 사마장, 오만이까지는 오마장, 연덕에서 이곳까지의 거리는 9마장 정도가 되므로 '구마장→구만이'라 하였다.

■ 가느골 암샘터(陰谷泉)
가느골 북쪽 덕고개 밑에 있는 샘으로 수량이 풍부하다. 이곳은 석회암 지대로 물이 지하로 스며들어 많은 양의 물이 분출하는데 이 물을 이용하는 문곡 송어장과 상록수 송어장이 있으며 가느골과 강구에 있는 수만 평의 논에 농업용수로도 이용되고 있다. 문곡리(文谷里) 암샘터의 지형(地形)은 여자의 음부(陰部)처럼 생겼으므로 '음곡천(陰谷泉)'이라 하였다.

세곡리(細谷里)의 원래 지명도 이 샘터로 인하여 '음곡리(陰谷里)'라 하였으나 이름이 흉하다 하여 '음(陰)'자 대신에 '세(細)'자를 써서 세곡리라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에 『陰谷泉 在郡北二十里 源出陰谷巖?中南流入千後津 음곡천은 군의 북쪽 20리에 있으며 물의 근원은 음곡의 바위 틈에서 나와서 남쪽으로 흘러 후진(방절리 서강)으로 흘러간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요즘도 가뭄이 들면 행실이 착한 여자를 골라 밤늦게 막대기로 '음곡천'을 쑤신 후, 고사를 지내면 비가 온다고 한다. 또, 연덕리 성황동에 어느 노인이 있었는데 집에서 기르는 큰 고양이가 7대 독자인 손자의 고환을 따먹은 일이 벌어졌다. 그 노인은 고양이를 죽인 다음 구렁걸레 굴물에다 던져 버렸는데, 생명력이 강한 이 고양이는 굴을 딸 가느골까지 와서 흙을 파고 나왔다고 한다. 그 후, 이 굴에서는 굴물이 쏟아져 나와 음곡천이 되었다고 하며 이 굴물의 수맥은 연덕리의 성황당 굴물과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 논들
가느골의 음곡천을 이용하여 논농사를 짓는 곳이다. 논이 많아 '논들'이라 하는데 논들 옆에 있는 가느골 서낭당의 숲터에는 황새와 학(鶴)이 둥지를 틀고 살았으나 현재는 농약의 해악으로 서식처 자체가 없어졌다.

■ 솔너머
가느골 서낭당이 있는 논들 건너 회챗골 서쪽에 있다. 옛날에는 이 마을앞에 큰 소나무가 많았으므로 '솔너머'라 한다.

■ 노루골
가느골 본 부락의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노루목처럼 길게 늘어진 길이 있으므로 '느린목골→노루목골→노루골'이 되었다. 일설에는 노루가 많이 잡혀서 생겨난 지명이라는 얘기도 있으며, 이 계곡의 막바지인 시루산 자락에서 솟는 샘물은 가느골과 개간이 마을의 상수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 시루산
장승백이 뒤에 있다. 천지 개벽 때 모두 물에 잠겼으나 이 곳만 떡시루만큼 남았었다는 전설이 있다. 이 산 밑에는 장군이 앉아 있는 형상의 장군대좌형국(將軍大座形局)의 명당터가 있는데 엄씨(嚴氏)네 집안에서 묘를 쓰려고 천광을 할 때 100여개의 사기 대접이 묻혀 있었다고 한다. 40년 전에 있었던 얘기라고 한다.

■ 장승백이
강구의 31번 국도 동쪽 시루산 자락에 자리잡은 마을로 한일석회광산이 있는 곳이다. 이곳은 일제시대엔 서면(西面) 사람들은 아래 덕전이와 두치재를 넘고, 북면(北面) 사람들은 가느골과 노루골을 지나 이곳 장승백이를 거쳐서 영월로 가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마을 입구에 돌장승이 있었으므로 '장승백이'라 하였다. '백이'는 '박+이' 즉 '박다'의 명사형으로 장승이 박혀있는 곳을 의미한다.

■ 강구(康衢)
회챗골과 왯둔지 사이에 있으며 문곡 3리이다. 31번 국도가 개통되기 전의 옛길은 강구 본부락을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장성백이, 서쪽으로는 두치재, 남쪽으로는 문성개 북쪽으로는 가느골과 개간이로 연결되는 교통의 중심지인 사거리 였으므로 '편안할 강(康)'자와 '거리 구(衢)'자를 써서 '강구'란 지명이 생겼다.

■ 가래실(楸谷)
강구의 서쪽에 있는 산간 마을이다. 지금은 문곡 농공단지와 접하고 있으며, 마을 입구에 큰 가래나무(추자나무)가 있었으므로 '가래실'이라 한다.

■ 성주바우골
보아구골 밑에 있는 작은 골이다. 농사를 주로 하는 영월 지방에서는 음력 10월에 길일(吉日)을 잡고 대문에서는 왼 새끼로 꼰 금줄을 치고 황토를 뿌려 잡귀의 근접을 막았다 안택은 성주신, 조왕신, 터줏대감 등을 대상으로 가정의 안녕을 기원하며 성주단지에는 햇곡식을 넣어서 보관하고 함께 명주실로 매단다. 이사를 갈 경우 성주단지는 산 속의 진흙 속에 묻고 한지로 접은 성주는 커다란 바위나 나무에다 매달아 놓는 풍습이 있었다.

이 골에 있는 큰 바우에다 성주를 매달아 놓았으므로 '성주바우골'이라 한다. 예전에 우리 조상들이 모시는 가택 신앙으로는 수문신(대문), 터줏대감(마당), 천둔신(장독대), 업신(고방), 정신(우물), 성주신(대청마루), 조왕신(부엌), 삼신, 조상신(안방), 칙신(칙간) 등이 있다.

■ 띠앗(茅田)
삼거리 동북쪽의 31번 국도 우측으로 문성개 마을의 본동이 된다. 예전부터 이곳에는 산과 들녘에서 흔히 자라는 다년초로 끝이 뾰족한 모초(茅草) 또는 백모(白茅)라고 부르는 띠밭이 있었으므로 '띠앗'이라 한다. '앗'은 '밭'의 고어로 '밭→밧→앗'으로 변하여 '띠앗'이 되었다.

■ 살담골
문성개의 띠앗 앞으로 흐르는 강구천에 있다. 이 하천은 물고기들이 많은 곳으로 늦가을에 마을 사람들이 돌담을 쌓고 싸리나무로 만든 얼레인 '살'을 설치하여 고기를 잡았던 곳이므로 '살담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 광대봉(廣大峰)
살담골과 살뚝 사이에 있는 두 개의 산봉우리이다. 크기와 형상이 비슷하게 생긴 병창으로 옛날 어떤 광대가 양쪽 절벽 사이로 줄을 탔으므로 '광대봉'이라고 한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으나 '광대봉'이란 '크고 높은 봉우리'라는 뜻이다.

■ 문성개
영월 삼거리와 띠앗 일대의 문곡 4리 마을이다. 가느골 음곡천(陰谷泉)에서 내리는 물이 서강(西江)으로 흘러 들어가면서 큰 개(물이 드나드는 곳)를 이루었으므로 '음성개→문성개'라는 지명이 생겼다. 어감이 좋지 못한 음곡천(陰谷泉)이 문곡천(文谷川)으로 바꾸어질 때 음성개가 문성개로 변하고 음(陰)자가 문(文)자로 바꾸어지면서 '음개실이→문개실'로 변하였다.

이곳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쓴 『충절만세(忠節萬世)』탑과 『반공희생자위령탑』이 있다.

■ 솔모장
옥녀봉 동쪽으로 소나무 숲이 우거져 있으므로 '솔모장'이라고 한다. 북쌍리의 갈골 앞에서 문개실로 건너가는 잠수교가 설치되기 전에는 솔모장 앞을 지나 나룻배를 이용하여 문개실과 쇠목으로 건너다녔다. 지금도 선돌 윗마을인 남애(南涯)로 가자면 이 앞을 지나야 한다.

■ 옥녀봉(玉女峰)
영월군 분뇨처리장이 설치된 갈골 앞에 있는 상봉우리이다. 옥구슬같이 동그란 모양을 하고 있으므로 '옥녀봉'이라고 한다. 단종 대왕이 청령포로 유배되어 올 당시 중추 부사 어득해(魚得海)의 호송으로 주천의 쉼터, 명라곡, 배일치, 갈골을 지나고 이곳 옥녀봉을 넘었다. 이곳은 수백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단종의 발자취가 그대로 남아있는 곳이며, 단종은 선돌, 날골, 서강을 지나 청령포에서 귀양살이를 하였다.

단종의 영월 유배를 단종실록에는 1457년으로 기록하고 있고, 남효온(南孝溫)의 육신전(六臣傳)에는 1456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실록에 의하면 단종대왕이 어득해와 내시부사(內侍府使) 홍득경(洪得敬) 그리고 군졸 50명의 호위 속에 6월 22일 광나루의 화양정(華陽亭)을 출발하여 유배지인 청령포에 도착한 것은 6월 28일이라고 적혀 있다.

■ 문암사(門岩寺)
문성개의 문포초등학교 뒤쪽으로 시루산 줄기 끝에 있다. 법화종으로 마차리의 요봉과 학전이 사이인 문암바위(門岩) 근처에 있어 그 이름을 '문암사'라 하였는데 1955년 여승인 서묘득 스님이 이곳으로 옮겼다.

■ 두목(杜牧)
능말에서 소나기재를 지나 삼거리 쪽으로 가다 보면 38번 국도 동쪽의 시루산(해발 700m)밑에 있는 마을이다. 예전부터 이곳 시루산에는 목마른 소가 물을 먹는 갈우음수형국(渴牛飮水形局)의 명당터가 있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으므로 이 소(牛)를 보호하기 위하여 마을 이름을 '막을 두(杜)'자와 '칠 목(牧)'자를 써서 '두목(杜牧)'이라 하였다.

■ 갈우(渴牛)고개
두목에서 문곡 장승백이로 질러가는 아스콘 공장 뒤에 있다. 갈우음수형국(渴牛飮水形局)의 명당터에 있는 고개이므로 '갈우고개→가로고개'라 한다. 예전에는 갈우고개와 장승백이를 지나 북면 연덕, 공기, 마차 등지로 가는 사람들이 이 고개를 많이 이용하였다.

■ 미니미골(山內谷)
한골과 물방아골 사이로 주차장 바로 위쪽에 있다. 옛날 소나기재로 38번 국도가 생기기 전에는 장승개와 갈우고개를 넘어온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지나 금몽암과 보덕사가 있는 능말(장릉)의 절골로 넘어 다녔다. 높은 뫼(메)안에 있는 골짜기이므로 '뫼내미골→미니미골'이 되었다.

■ 장자골(長者谷), 장재터
두목(杜牧) 동남쪽의 끝 계곡으로 시루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지금은 농사를 짓는 장귀용 씨 일가만 살고 있는데 한때는 여덟 가구까지 살았었다. 4공화국 때 무허가 사철정리로 이곳에 있던 『장덕사』라는 절이 폐사(廢寺)되었다. 장재터 밭에는 지금도 옛날 기와장과 접시 등이 많이 발굴되는데, 이곳이 바로 신화랑이라는 큰 무당이 살던 집터였다고 한다. 신화랑은 영월 인근에서는 명성을 날렸으며 그를 찾아와 불공을 드리는 사람들로 매 끼마다 쌀을 씻어 낸 부연 뜨물이 계곡 물을 따라 아랫마을인 망수랭이까지 흘러 내렸다고 한다.

■ 자료출처:「영월 땅 이름의 뿌리를 찾아서」저자 엄흥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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