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읍면구분 | 김삿갓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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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각동리 |
| 내용 |
■ 뱃나드리
김삿갓면 대야리(大野里) 맛밭과 각동(角洞)으로 이어지는 나루터이다. 1950년 전만 해도 정선과 임계 등지에서 베어낸 통나무로 만들어진 뗏목과 영월 지방 특산물인 담배, 콩, 옥수수 등 잡곡을 실은 돛단배가 남한강 500리 뱃길을 따라 서울 광나루에 도착하는 데는 열흘 이상이 걸렸다. 깎아지른 듯한 기암절벽의 계곡 사이로 흐르는 남한강 물줄기에 돛단배를 띄어놓고 구성진 정선 아라리를 부르는 뱃사공들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고 한다. 뱃사공들은 소금, 광목, 석유 등의 생필품을 가지고 돌아오면서 여울목에서는 줄로 끌어올리고 물이 많은 곳은 노를 저어 올라오며, 곳곳에 있는 작은 포구에서 물건을 팔았다. 각동에서도 보부상이나 도부꾼 뱃사공들이 배를 정박시키고 물건을 팔았는데 이곳은 강물이 굽어 도는 곳으로 배가 드나들었으므로 '뱃나드리'라 하였다. ■ 진촌(津村) 일명 중말(중간 마을)이라고 부른다. 이곳은 강 건너에 위치한 오룡동(五龍洞)과 두름 마을로 건너가는 나루터가 있으므로 '진촌'이라고 불렀다. ■ 봉우재 두름마을 뒤에 있는 산봉우리로 이 고개를 지나면 영춘면(永春面) 용진리(龍津里)로 간다. 봉우재 밑에는 석성(石城)인 대야산성(大野山城)이 있으므로 삼국시대의 왕검성, 완택산성, 태화산성, 그리고 단양의 온달성을 연결시키는 봉수터(烽燧基)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 시대에는 영월에 봉수대(烽燧臺)와 파발마(擺撥馬)제도가 없었다. 봉수제란 밤에는 불로서 보내는 봉(烽)과 낮에는 이리의 똥을 태운 연기로 연락하는 수(燧)를 합친 합성어로 평상시에는 1거(炬), 적이 나타나면 2거(炬), 국경에 가까이 오면 3거(炬), 국경을 넘으면 4거(炬), 전쟁이 벌어지면 5거(炬)로 연락을 하였다. ■ 물골 봉우재 밑에 있는 골짜기로 물이 솟아나는 샘터가 있어서 '물골'이라 부른다. ■ 두름 중말(中村)앞 나루터 건너에 있다. 맛밭에서 가재골을 지나야 갈 수 있는 교통의 오지로 자연 경관이 아름다운 마을이다. 이곳은 예전부터 10가구가 살았는데 가구 수가 조금만 늘어나도 마을에 화재가 나거나 가축이 죽는 등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고 한다. '두름'이란 '생선을 10마리씩 두 줄로 엮은 것'을 말하는데, 이 마을은 10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살았으므로 그 지명을 '두름'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언덕위 마을'이라는 뜻인 '두릉'이 '두름'으로 변한 것 같다. ■ 잿말 골마을(골말) 옆으로 예전에 이곳에 큰 기와집이 있었다. 기와집은 재와집으로 소리가 나며 '기와집 마을→재와집 마을→잿마을→잿말'이 되었다. 일설에는 재(둔덕) 위에 있는 마을이라는 얘기도 있다. ■ 오룡동(五龍洞) 중말의 강 건너에 있다. 두름으로 가기 전에 있는데 마을 뒤 구슬봉에서 뻗어 내리는 다섯 줄기 산등성이의 맥이 모이는 곳으로 그 형상이 용의 모습과 같다. 다섯 마리의 용이 여의주(如意珠)를 놓고 다투는 오룡쟁주(五龍爭珠)의 명당이 있어 '오룡동(五龍洞)'이라 한다. 1984년까지도 정태섭, 고온영씨의 두 가구가 살았었다. 오룡골 앞에는 '오룡소'가 있다. ■ 골마을 각동리가 소(沼) 형국이라면 골마을은 소가 물을 마시는 입에 해당하는 움푹 들어간 골짜기이므로 '골마을'이라고 한다. ■ 새터(新基) 골말과 샘골 사이에 위치하며 광산 개발로 외지에서 들어온 사람들이 사택을 짓고 살았던 곳이므로 '새터(新基)'라 한다. ■ 괴목(槐木) 샘골과 새터 사이에 있다. 마을에 큰 괴목(槐木, 느티나무)이 있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 앞에는 커다란 거북바위(龜岩)가 있어 '구암'이라고도 했다. ■ 각동리 돌널무덤(石棺墓) 괴목 서남쪽의 용구미소 위쪽에 있었다. 이곳은 태화산 줄기가 가로막혀 겨울에도 북풍이 없는 따뜻한 곳으로 토질이 비옥하고 남한강의 맑은 물이 흐르는 곳이므로 선사시대(先史時代)인 청동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했으며, 분지인 영월지방에서 유일하게 감나무가 많이 자라는 고장이다. 돌널무덤은 일제 시대에 원용성(元容成)씨의 구릉진 밭에서 발굴되었는데, 무덤은 두께 7∼10cm되는 자연석으로 쌓았으며, 너비 130cm, 길이 175cm의 덮개돌로 덮혀 있었다. 이 덮개석은 마을 공동 우물의 다리로 이용되었으나 새마을운동때 덮개석 자체를 시멘트로 발라버렸다. 출토된 유물은 간돌칼 1점과 간돌화살촉 8점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 용구미소 괴목과 샘골 사이에 있다. 용구미소는 깊고 구미가 져서 명주실 한 꾸리를 다 풀어도 끝이 닿지 않는데, 옛날에 형제 장수가 용(이무기)을 잡으려고 들어갔다가 죽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이곳은 사시사철 낚시꾼들이 즐겨 찾는 곳으로 잉어, 붕어, 뱀장어 등이 많이 잡혔는데 영춘(永春) 군관교 위에 소수력 발전소가 만들어지면서 어로(漁路)를 설치하지 않아 고기가 올라오지 못하므로 낚시꾼들이 많이 줄었다. ■ 자료출처:「영월 땅 이름의 뿌리를 찾아서」저자 엄흥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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