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읍면구분 | 산솔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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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화원리 |
| 내용 |
화원리
■ 화원리(禾院里) 중동면 화원리는 1914년 행정구역 통합에 따라 '화라리(禾羅里)'와 '소미원(小味院)'에서 한 자씩 따서 그 지명이 만들어졌다. 화원리는 망경대산 줄기로 고갯길이 험악한 수라리재가 있어서 예부터 원집이 있었다. 원(院)에는 여러 개의 목로방이 있었고 부엌에는 쌀과 반찬이 준비되어 있어서 잠을 자고 난 길손들은 새벽밥을 해 먹고 나무로 만든 엽전꽂이에 돈을 꽂아놓고 길을 떠났다고 한다. 현재는 2개리 91가구에 345명(1992년 기준)의 주민들이 화라리, 바닥터, 점골, 망전이, 소미원, 성황골, 장광마을 등지에서 콩, 옥수수, 감자, 고추 등을 재배하고 있다. ■ 화라리(禾羅里) 석항에서 녹전으로 가는 수라리재 아래 새벌마을, 잿마을, 점골을 통틀어서 말한다. 마을의 진산(鎭山)에 해당하는 수라리재의 지세(地勢)가 너무 강하므로 마을의 기(氣)를 살리기 위하여 돌단배기에다 조산(造山)인 돌탑을 쌓고 마을 이름도 수라리재의 '수'와 대립되는 '화'를 넣어 '화라리'라고 하여 마을의 기(氣)를 강하게 했다고 한다. ■ 덕밭골 뒷대골 서쪽에 있다 돌이 많은 신전으로 농사를 지을 때 쌓아놓은 커다란 돌서덕밭이 많은 골짜기이므로 '돌서덕밭골→서덕밭골→덕밭골'이 되었다. 이 골짜기를 넘으면 연상리의 궁장동으로 갈 수 있다. ■ 솔안이(松內) 화라리 동쪽으로 소나무숲 안에 있으므로 '솔안'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지금도 수라리재로 가는 도로의 좌우측에는 소나무숲이 우거져 있으며 동쪽 언덕 위의 넓은 들녘에는 솔안이 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 돌단배기(造山) 화라리의 지세(地勢)는 남쪽을 가로막고 있는 수라리재의 맥이 너무강하게 뻗어내려 마을 자체를 위협하는 형상이라고 한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솔안이 뒤에다 조산(造山)인 돌단을 쌓고 마을의 약한 기(氣)를 보강하였으며, 그 때 쌓은 돌탑이 있었던 곳을 '돌단배기'라 부르고 있다. ■ 바닥터 화원리 자체가 험준한 태백산 줄기의 언덕 위에 형성되었는데, 이 동네만 넓고 평평한 바닥에 조성되었으므로 '바닥터'라고 불렀다. ■ 점골(店谷) 화라분교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예전에 이곳에는 진흙으로 옹기 그릇을 굽는 옹기점 마을이 있었으므로 '옹기점말→점말'이라는 지명이 생겼다. 옹기점에서는 오짓물을 발라 구운 오지 그릇은 생산하지 않고 진흙만으로 초벌구이를 해서 만든 윤기가 없는 질그릇인 대독, 중도리독, 항아리, 화로, 시루 등을 만들었다고 한다. ■ 수라리재 화원리에서 녹전으로 넘어가는 31번 지방 도로 중 가장 험한 고개이다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恭讓王)이 삼척의 궁촌으로 유배될 때 이 고개에서 수라(왕이 먹는 음식)을 들었다 하여 '수라리재'라고 한다는 유래가 있다. 공양왕은 태조 이성계에 의해서 원주군 부론면 손위실에 유배되었으나 한양과 너무 가까운 곳이라 하여 1392년 8월 7일(음력)에 고성군 간성읍 탑동리(塔洞里)의 수타사(壽陀寺)로 옮겨져서 굴욕의 나날을 보냈다. 공양왕의 삼척군 궁촌으로 세 번째로 유배되었다가 결국은 조선 태조 3년 1394년 4월 17일에 죽임을 당했다. ■ 당재 수라리재 옆에 있는 고개로 31번 국도가 개통되기 전에는 사람들이 개울 옆으로 난 이 고개를 넘어 다녔다. 즉 가이천 위에서 잿마을로 질러가는 지름길로 그 언덕에는 서낭당과, 행인들이 안녕을 기원하며 돌을 주워 쌓아놓은 국시당(돌무더기)이 있었다. 즉, 서낭당(城皇堂)이 있는 고개이므로 '당재'라 한다. ■ 망전리(望田里) 화라리에서 소미원(小味院)과 망경대산(1,087.9m)이 있는 한일탄광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망경대산 밑에 형성된 마을이므로 '망전'이라는 지명이 생겼다. 전에 망경탄광(한일광업소)이 있었을 때는 많은 사람들이 거주했었다. ■ 원터(院基) 소미원은 경북 봉화로 가는 교통의 요충지로 서낭당 북쪽의 솔모디기 부근에 원집(院舍)이 있었다. 원집은 조선 후기로 넘어오면서 인가(人家)가 드문 곳에 원(院)을 설치하고 쌀, 반찬, 짚신 등을 준비해 두었으며 길손들이 이곳에서 잠을 자고 난 후 밥을 해먹고 짚신을 신고 가게끔 편의를 제공했었던 곳이다. 행인들은 그 대가로 일정액의 엽전을 나무로 된 엽전꽂이에 꽂아놓았다. 원집이 점차 그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결곡은 목로집(뜨거운 방바닥에 여러 사람들이 목침을 베고 자는)형태로 전락하고 말았다. ■ 장광마을 마을 회관 남쪽의 넓은 들녘에 있는 마을이다. 이곳은 병자년(丙子年) 가락때 큰 홍수로 인하여 너럭바위와 자갈로 뒤덮였다고 한다. 즉 물가의 넓은 돌밭에 있는 마을이므로 '장광마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 위쪽에는 고령토 광산이 있다. ■ 장광 약수터 장광마을의 고령토광산 밑에 있다. 위장병에 효력이 있다고 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 떡갈목이(德葛木) 장광 동쪽 이목리로 가는 산길이 있다. 예전에는 대여섯 가구의 화전민이 살았으나 지금은 무인촌이 되었다. 이것은 참나무과에 속하며, 늦봄에 황갈색의 꽃이 피었다가 도토리 열매가 달리는 떡갈나무가 많은 고개(목이)이므로 '떡갈목이'라 부르게 되었다. ■ 반정이(半程理) 지경터 아래에 있는데 이곳은 화원리(禾院里)와 와석리(臥石里)의 중간 지점이 되므로 '반정이→반쟁이'라고 하였다. ■ 자료출처:「영월 땅 이름의 뿌리를 찾아서」저자 엄흥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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