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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면 지명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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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7.12.04 , 조회수 1455
역사/문화>지명유래 상세보기 - 읍면구분, 제목, 내용, 파일 정보 제공
읍면구분 산솔면
제목 직동리
내용 직동리

■ 직동리(稷洞里)
직동리는 해발 750m의 높은 지대로 음력 9월이면 민물 김이 채취되고, 조개껍질과 같은 바다생물의 화석이 발견되는 곳이다. 백운산(白雲山) 자락의 두메 산골인 이 마을은 민초(民草)들의 한 어린 사연이 남아 있는 곳으로 의병, 동학교도들이 관군과의 접전에서 집단으로 피살되었으며, 가까이는 1949년 좌익 빨치산에 의해서 이 동네의 우익 청년단원 10여명이 학살당한 곳이다. '직동리'의 유래는 수많은 의병과 동학교도들이 죽으면서 흘린 피가 계곡 전체를 붉게 물들였으므로 '피 稷'자와 '골 洞'자를 써서 '稷洞里', '핏골'로 부르게 되었다.

큰마을, 찰골, 장수골, 상막동, 하막동, 한밭골 등의 자연부락에서 73가구 267명이(1992년 기준) 화전과 밭농사를 짓고 있으며 김해 김씨가 많이 사는 곳이다. 특히, 깨끗한 물을 이용한 송어 양식장이 여섯 곳이나 생기면서 푸른 빛을 띠고 흐르던 직동천과 주위의 너럭바위들은 그 본래의 깨끗함이 사라지고 있다. 직동리는 산이 높아 옛날에는 호환을 당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지금도 곳곳에 호식총(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사람의 무덤에 떡시루를 씌우고 삼베할 때 쓰는 쇠챙이를 꽂아놓은 곳)이 있다.

■ 큰마을(大基洞)
직동리의 중심이 되는 곳이므로 '큰마을, 큰말' 또는 '큰터(大基洞)'라고 부른다. 마을 앞에는 베리소와 직동교회가 있는데 이곳은 사거리로 옛날 7선녀 8건달이 놀던 곳이라 한다.

■ 단풍산(丹楓山)
31번 국도에서 직동리 큰터로 들어가는 길 옆에 있는 산으로 단풍나무가 많아서 붙은 이름이다. 가을철이 되면 붉게 물든 단풍이 직동천의 맑은 냇물을 타고 흘러 내려서 계곡 전체가 단풍잎으로 뒤덮인다. 지금은 31번 국도에서 직동까지 도로가 있지만 예전에는 이곳까지 12개의 징검다리를 건너야만 갈 수 있었다.

■ 단풍하리(丹楓下里)
단풍산 밑에 있는 마을이므로 '단풍하리'라 하는데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촌(無人村)이 되었다.

■ 음지마을
큰터에서 찰골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으며 햇살이 비치지 않는 음지 쪽에 있는 마을이다. 일제 시대 때 이곳 장수골에 살던 김찰이라는 사람이 의병(義兵)을 조직하여 왜병을 격퇴시켰다고 한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죽어서 그 핏물이 온 골짜기를 붉게 물들였으므로 핏골(직동리)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찰골도 김찰이라는 의병장의 이름을 따서 '찰골'이라고 한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하동 지역에 몰려 있던 의병들이 이곳 찰골로 옮겨와서 일본군과 격전(激戰)을 벌여 수십명을 사살했는데 일본군이 쳐들어오면 안개가 자욱하게 내려서 의병들을 숨겨주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또한, 1968년 북한 무장공비가 출몰하여 화전민을 학살한 사건이 있자 정부에서는 찰골에다 집을 짓고 화전민 60세대를 집단으로 정착시켰으므로 일명 '전략촌'이라고도 부른다.

■ 연작(連作)
찰골 동쪽에 있는 산촌으로 화전민들이 많이 살던 곳이다. 화전(火田)은 땅에 묵혔다가 다시 농사를 지어야 하는데 이곳 토지는 토질이 좋아 매년 이어짓기가 가능한 곳이므로 '연작'이라 하였다. 일설에는 이 마을의 지형이 제비가 둥지를 튼 듯 아늑하고 평온한 느낌을 주는 연소형(燕巢形)의 명당이므로 '연작(燕作)'이라 불렀다는 얘기도 있다.

■ 막동(幕洞), 말골
예전 동학교도(東學敎徒)들이 정부의 탄압을 피하여 이곳에다 외로 엮은 막을 치고 숨어살았으므로 '움골' 또는 '외막골→막골'이라고 불렀다. 천주교(西學)에 반대하여 교우 최재우가 동학(東學)을 창시하였으며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교세(敎勢)가 확장되었다. 이에 정부에서는 최제우를 『혹세무민의 죄』로 대구에서 처형하고 동학교도를 탄압하였다. 그후 2代 교주 최시형은 가족과 함께 단양, 인제군 갑동리, 정선 갈래사의 적조암(寂照庵)과 영월군 직동리로 피신하였다.

인제 갑동리에서 동학의 경전인 「동경대전」을 간행하고 단양에서는 가사집인 「용담유사」를 만들었다. 특히 1871년 2월 부터는 직동(핏골)의 동학교도인 박용걸(朴龍傑)의 집에 머물면서 영월, 정선, 단양 등지의 동학교도들을 상대로 포교 활동을 했는데, 최경상은 중동면 화원리의 소미원을 중심으로 포교 활동을 많이 하였다.

■ 용바우(龍岩)
하막동 동북쪽에 있는 바위로 가뭄이 심할 때 바위에다 기우제(祈雨祭)를 지내고 물을 뿌리면 비가 왔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 직동천(稷洞川)
정선군 백운산을 발원지로 하여 직동리를 거쳐 옥동천(玉洞川)과 합류하여 남한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 두멧골(두무실)
동북쪽으로 백운산 두리봉의 높은 산줄기가 마을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둠뫼마을이므로 '둠뫼→두뫼→두메골'로 불리게 되었다. 동네 어귀에 화절치에서 막골로 흐르는 개울이 있는데 이곳에는 3cm정도 크기의 푸른 민물김이 자라고 있다. 특히 샛바람(동풍)이 많이 부는 해는 9∼10월에 많은 양을 채취하여 채를 엎어놓고 그 위에 말렸다가 먹으면 바닷김과 똑 같은 맛이 난다고 한다. 즉 큰 뫼(산)에 막혀있는 두메 산골 이므로 '두뫼골'이라 한다. 그후 '두뫼골→두메골→두무동'으로 변하였다.

■ 상막골(上幕谷)
막골 위에 있어서 '상막골' 또는 '윗막골'이라 한다. 그 위에는 가나무터가 있다.

■ 화절치(꽃꺾이재)
직동리 북동쪽으로 정선군 고한읍과 경계인 백운산(白雲山)자락에 있는 고개이다. 옛날부터 정선으로 질러가는 교통의 중심지로 봄철이면 참꽃과 철쭉이 만발하여 행인이나 나무꾼들이 이 꽃을 꺾어 갔으므로 '꽃꺾이재→화절치'라고 불렀다. 농촌에서 땔나무를 하는 총각들이 이곳에서 꽃꺾이 내기를 하였는데 여러 종류의 꽃을 먼저 꺾은 사람이 이긴다. 이 놀이에서 진 사람들은 이긴 사람에게 나무 한 단씩을 주었다고 한다.

이 고개를 넘으면 운학초교가 있으며, 화절평과 골말을 지나 사북(舍北)으로 갈 수 있다. 빨치산 활동이 기승을 부리던 1949년 8월 22일에 영월군 군사위책 연구백이 체포되어 호송되던 중 소나기재에서 강병학 순경의 권총을 탈취하여 그를 저격하고 도주하였다. 연규백은 그해 12월 21일에는 상동면 직동리를 습격하여 우익 청년 10여명을 학살하고 이곳 화절치를 넘어 정선군 사북쪽으로 도주했다가 1950년 1월 다시 목우산(牧牛山)으로 숨어들었다.

■ 새비재(鳥飛峙)
한밭골에서 정선군 신동읍(新東邑) 함백(咸白)으로 가는 고개이다. 길이 높고 험하며 산의 형상이 새가 날아가는 모양과 같다고 하여 '조비치(鳥飛峙)'라는 지명이 생기게 되었다.


■ 자료출처:「영월 땅 이름의 뿌리를 찾아서」저자 엄흥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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