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로 바로가기
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읍·면 지명유래

Home 영월소개 일반현황 읍·면 지명유래
작성일 2017.12.04 , 조회수 1895
역사/문화>지명유래 상세보기 - 읍면구분, 제목, 내용, 파일 정보 제공
읍면구분 산솔면
제목 녹전리
내용 ■ 녹전리(碌田里)
녹전리는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111호에 의하여 행정 구역을 개편하면서 녹전리(碌田里)와 유전리(柳田里)에서 첫 자를 따서 '녹전리'라고 하였다. 원래는 상동면으로 면 소재지가 이곳 녹전리에 있었으나 상동광업소가 개광(1923년)되어 1973년에는 구래리의 인구가 3만이 넘자 녹전리 주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면이 읍으로 승격되면서 읍 소재지를 구래리(九來里)로 옮기게 되었다. 녹전리에는 중동면사무소와 녹전중학교, 지서, 농협, 우체국 등 관공서가 있다. 녹전리는 법정 4개 리로 294가구 1,106명(1992년 기준)의 인구가 녹반리, 행금벌, 응고개, 시누리, 유전리, 도화동 등지의 자연 부락에서 밭농사를 주로 하고 있다.

■ 녹전시장(碌田市場)
녹전리의 양지마을에 5일 장이 개설되어 녹전 내리, 유전, 직동사람들이 이용했는데 옛날에는 송이버섯으로도 유명한 장터였다.

■ 양지마을
녹전리의 중심지로 면사무소, 지서, 녹전중학교 등이 있다. 음지마을의 건너편으로 항상 햇빛이 비치는 곳이므로 '양지마을'이라 한다.

■ 녹전소(碌田沼)
양지마을에 있는 녹전중학교의 느티나무 앞에 있다. 일명 무당소라고도 하는 푸르고 깊은 소(沼)로 옛날에 어떤 무당이 굿을 하다가 이곳에서 빠져 죽었다는 전설이 있다.

■ 장승백이
신작로가 나기 전에는 이목리(梨木里)의 선령약수(仙靈藥水)에서 장구목쟁이를 넘어 녹반리의 장승백이로 갈 수 있었다. 장승은 영월, 하동, 태백으로 가는 삼거리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길손들이 지나 다니는 교통의 중심지로 행인들의 이정표 역할을 하였다.
장승의 일반적인 기능은 도로의 이정표와 노신(路神)의 역할을 하는 노표(路標)장승, 동네의 虛한 곳을 보호하기 위해서 세우는 비보(裨補)장승, 마을로 들어오는 재앙과 액을 물리치는 부락수호장승 등이 있었다.

■ 추자나무골
신배나무골에서 제비바위로 가는 서쪽에 있다. 큰 가래추자나무가 있어서 '추자나무골'이라 하였다.

■ 장고목재
31번 지방도가 개통되기 전에는 사람들은 장승배기에서 장고목재(장구목쟁이)를 넘어 선령약수가 있는 이목리를 지나 영월쪽으로 걸어 다녔다. 이곳은 양쪽 산마루가 볼록하고 허리가 잘록한 장고(杖鼓)의 목처럼 생긴 고개이므로 '장고목재'라 한다. 일설에는 옛날에 장군이 넘어온 고개라는 얘기도 있으나 이것은 잘못된 이야기다. 6.25때 녹전리의 청년 방위군이 이곳에서 북괴군을 맞아 싸우다가 10여명이 전사한 곳이기도 하다.

■ 녹반리 서낭당
녹전중학교 앞에 있으며, 수령이 300년의 느티나무 신목(神木)이 있다. 단종이 태백산 산신령이 되었다고 믿는 마을 사람들이 단종 대왕의 영정을 모시고 해마다 당제(堂祭)를 지냈으나 1972년 새마을운동 때 서낭당은 불태워 졌다. 이곳 서낭당은 소를 자방 제물을 쓸 정도로 큰 당고사를 지냈으며 마을 사람들의 화합의 마당이 되기도 하였다.

■ 녹전 경찰전적비
녹전리 음지마을에 있는 경찰전적비이다. 강원 경찰의 최대 공방전이었던 녹전리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서 건립한 비석이다. 6.25 당시영월은 화력발전소, 상동중석광산, 마차광업소 등이 있었으므로 이를 사수하기 위해 김인호(金麟鎬) 총경이 파견되었다. 그 당시 상동에 주둔하고 있던 전경 제 1중대장 김해수(金海洙) 경위는 50명의 대원으로 결사대를 조직하여 영월화력발전소에 집결하려고 상동을 출발하여 솔치고개를 넘으면서 북괴의 척후병 2명을 사살하고 녹젼교 부근에 집결해 있는 1개 소대를 격퇴시켰다.

이어서 후방에 있는 적 1개 대대병력과 전투가 벌어졌는데 숫적으로 불리한 경찰은 피비린내 나는 백병전을 전개하여 많은 적을 사살했지만 우리 쪽에서도 김해수 대장과 석상익(石商益) 경위 등 24명이 7월 7일 전사하고 나머지 경찰들도 대부분 중경상을 입은 대격전이었다.

■ 목우산(牧牛山)
태백산 줄기로 중동면 녹전리의 응고개와 하동면 내리, 상동읍 덕구리를 감싸고 있다. 빨치산의 본부가 있던 곳으로 지금은 1962년에 건립된 '목우사(牧牛寺)'라는 절이 있다. 목우산은 험준한 산악 지대로 남로당의 빨치산(Partisan)과 남침한 야산 유격대들이 1949년 강동정치학원 출신인 대대장 박갑수(영월, 가명 虎林)와 군사사상 책임자 연규백을 중심으로 목우산에 본부를 설치하였다. 이들은 남로당 재건 공작과 우익 인사에 대한 살상과 식량, 금품, 의류 등의 약탈을 일삼았다.

그후 이들의 활동을 탐지한 엄정주 영월경찰서장(6代 국회의원)이 이들의 검거에 나서 남로당 상동광산책 양귀용과 250여명, 상동면당책 김장수 이하 각리책 및 세포조직 120명, 그 외에도 강원도당 군사부위원 정충조를 비롯하여 강원도 군사 세포 책임자, 주천 고급중학교 책임자, 주천면당책, 보급책, 남면당책 등 수백명을 체포하여 빨치산의 하부 조직을 뿌리뽑았다.

그러나 연규백은 8월 22일 서울로 압송 중 영월 소나기재에서 호송 책임자인 박인근 경사와 강병학 순경의 권총을 탈취하여 두 사람을 쏘아서 중상을 입혔다. 목우산으로 도주한 연규백은 빨치산 대원들의 사기 양양을 위해 1949년 12월 21일 저녁 8시에 직동리를 습격하여 반동분자 숙청이라는 명목으로 우익 청년단 10여명을 사살하고 마을을 불태운 채 화절치를 넘어 정선군 사북 백운산으로 갔다가 다음 해에 다시 목우산으로 숨어들었다.

1950년 2월 8일 밤 11시 30분 상동지서에서는 박운선 형사 등 경찰관 5명이 자수자인 하동면당책 임무상과 임기상, 김타룡, 고성술과 함께 목우산의 아지트를 공격하여 군사책 연규백과 유격 대대장 박갑수 외 3명을 사살하고 나머지 4명은 생포함으로써 영월 군당 군사 위원회인 빨치산의 조직은 무너졌으나 그 후 태백산 줄기인 목우산 밑에 있는 응고개 마을의 우태봉 씨 일가족은 울진, 삼척지방에 출몰한 무장 공비에 의해 학살된 일도 있었다. 그 당시 강원도 경찰학교가 영월 보덕사에 있었다.

■ 행금벌
녹전리와 응고개(鷹峴) 사이로 행금벌 휴게소가 있는 마을이다. 태백산의 어평에서 발원하는 옥동천(玉洞川)은 천평리(川坪里)의 치랭이(칠랑이)골과 내덕리(內德里), 덕구리(德邱里)를 지나 솔고개에서 급경사를 이루며 행금벌 앞으로 흘러간다.

구한말과 일제때부터 천평리 상류인 어평(御坪)은 사금(砂金) 채취로 유명한 곳이며, 경북 봉화(奉化)와 강원도 상동(上東)의 경계인 덕구리(德邱里)의 금정(金井)도 금광으로 유명한 곳이다. 이곳에서 흘러내리는 계곡은 솔고개에서 급회전을 함으로 행금벌 앞에는 사금이 섞인 모래가 많이 쌓이게 된다.

70∼80년 전만 해도 이곳은 사금을 채취하여 행금질을 했던 벌판이었으므로 '행금벌'이라는 지명이 생겼다. 경찰전적비가 있는 음지마을을 건너가는 입구에도 금광을 개발하던 굴이 있다. 그후 1923년에 상동중석광업소가 생기면서 중석 가루가 상동천으로 흘러내려 '보크'로 이것을 채취하여 광산집에 팔아 생활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패재의 공해를 막기 위해 1973년에 패재댐이 완성됨으로서 매일 1만 m²의 중석가루가 섞인 광물이 맑은 물로 변하게 되었다. 일설에는 옛날 의병들이 이곳을 행군(行軍)하여 지나갔으므로 '행군벌'이라 했다는 얘기도 있다.

■ 용바우소
행금벌 앞에 있는 소에 용머리 모양의 바위가 있다. 옛날 이곳에는 용으로 승천한다는 큰 이무기가 살았으므로 '용바우소'라고 불렀다. 지금도 수심이 깊고 항상 맑은 물이 고여 있는 곳이다.

■ 응고개(鷹峴)
응현동(鷹峴洞)에서 솔고개로 질러가는 옛길로 31번 국도가 개통되기 전에는 사람들이 이 고개를 넘어 다녔다. 사람의 정수리(머리 끝 부분)같이 뾰족하고 높은 산봉우리가 이곳에 있으므로 우리말로 '수리뫼'라고 불렀다. '수리'란 '가장 높은 곳'을 가리킨다. 그 후 세월이 흐르면서 '수뢰뫼'의 '수리'는 '독수리'라는 뜻으로 차음화되어 '응고개(鷹峴)'로 변하게 되었다.

■ 응현동(鷹峴洞)
행금벌과 시누리(詩樓里) 사이인 목우산 밑에 있는 마을이다. 응고개 밑에 있는 마을이므로 '응고개→응현동'이라 부른다.
스물 여섯 가구가 살고 있는 이 마을에는 태백산 신령이 되어 가시는 단종에게 머루를 바치는 영정이 모셔져 있었는데, 이것은 1950년에 지발광이라는 환쟁이가 그린 것으로 1972년 새마을운동때 당집과 함께 불태워졌다. 지금도 그 자리는 수백 년이 지난 엄나무(개드릅나무)당목이 있는데 느티나무 3주는 목상에게 팔아버렸다고 한다.

예전에는 정월 보름날 돼지를 잡고 떡, 삼색 실과, 메를 지를 지어 놓고 고사를 지냈으며, 당고사 후에는 좌상 어른이 마을에서 잘못한 사람은 꾸짖고, 싸운 사람들은 화해를 시키는 등 동네의 화합과 단결을 꾀하는 자리가 되었다. 당고사가 끝나면 돼지고기와 음식들은 마을에서 나누어 먹었다고 한다.

■ 마고개(馬山)
응고개의 마을 가운데 있는 산으로 일명 마수고개라고 하는데 그 밑에는 2만평 정도나 되는 넓은 땅이 있다. 마고개 아래 양지 뜰에는 80마지기 정도의 넓은 무논이 있는데, 6.25전만 해도 이곳 진흙을 파내어 옹기 그릇을 만들던 옹구점이 있었다. 진흙을 파낸 구덩이는 풀이나 청솔가지로 메꾸었는데 지금도 논을 갈다보면 소가 이 구덩이에 빠지는 일이 있다고 한다.

■ 유전(柳田)
녹전초등학교 뒤쪽에 있는 마을로 하유전(下柳田)과 상유전(上柳田)이 있는데 이곳에는 지금도 버들 방천이 많이 있다. 옛날에 이목리(梨木里)와 유전리 일대의 버드나무나 싸리를 이용하여 키나, 고리짝을 만들던 천민 집단 구역인 이목소(梨木所)가 이웃 마을인 이목리에 있었다. 버드나무가 많아서 '버들밭골, 버들아치'라고 했으나 한자식 표기법으로 '유전(柳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신승동국여지승람」에 『梨木所, 在郡東五十里』로 기록되어 있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녹반리와 유전리의 지명에서 한 자씩 따서 '녹전리'가 되었다. 녹전초등학교를 지나 유전으로 가는 도로 좌측에 단종 대왕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유전리 서낭당이 있다. 녹전과 응고개 서낭당은 1972년 새마을운동 때 미신 타파 정책의 일환으로 행정 기관과 새마을 지도자들에 의해 불태워졌지만 이곳 유전리는 당집을 불태운다는소문이 나자 마을 노인들이 서낭당에 기거하면서까지 반대하여 소실되는 것을 막았다. 유전리 서낭당은 태백산 산신령이 된 단종 대왕을 모시고 있다.

■ 도화동(桃花洞)
조선 후기 정감록 같은 비기서를 신봉하는 강릉(江陵) 최씨 일가가 도화락지형(桃花落地形)의 명당인 이곳을 찾아와서 생활의 터전을 잡은 곳이다. 밖에서 보면 마을 입구가 좁고 사람이 살지 않는 동네 같으나 그 안은 넓고 땅이 기름져서 농사가 잘 되고 6.25때도 인민군이 들어오지 않았다고 한다. 즉 도화락지형국(桃花落地形局)의 명당이므로 '도화동'이라고 했는데 현재 삼성석회 광업소가 있다. 이곳으로 들어가는 길은 유전에서도 갈 수 있으나, 자동차로 가자면 시누리를 지나 31번국도 좌측으로 들어간다.

■ 적벽(붉은 뱅이)
하유전과 상유전 사이에 있다. 해가지는 저녁때가 되면 적벽산 주변의 암벽이 붉은 색을 띄므로 '적병' 또는 '붉은 뱅이'라고 한다.

■자료출처:「영월 땅 이름의 뿌리를 찾아서」저자 엄흥용
파일

담당부서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