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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면 지명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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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7.12.04 , 조회수 2130
역사/문화>지명유래 상세보기 - 읍면구분, 제목, 내용, 파일 정보 제공
읍면구분 상동읍
제목 구래리
내용 구래리

■ 구래리(九來里)
태백산 줄기인 민잭산과 고직령에서 흐르는 물이 웃냇뜰(상천평)을 굽이 돌아 농거리에서 어평천과 합류한 후, 심산유곡을 이루면서 칠랑이의 아우라지에서 구래천과 어우러져 남한강 상류인 맛대로 이어진다.

구래리의 유래는 자장법사(慈藏法師)가 636년(선덕왕 5) 당나라에 들어가 8년간의 고행을 마친 후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가지고 왔다. 자장법사는 이것을 봉안하기 위해 '태백산 갈반지(葛蟠地)'를 찾으려고 상동을 아홉 번이나 다녀갔으므로 이곳을 '구래리(九來里)'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자장은 본구래에서 시작되어 정선으로 뻗은 아름드리 칡넝쿨을 따라 갔는데 지금의 정암사(갈래사, 또는 석남원) 터 눈밭 위에서 푸른 잎에 3송이 붉은 꽃망울을 터뜨린 '삼갈반처(三葛盤處)'의 명당을 찾아 수마노탑을 쌓고 사리를 모셨다고 한다. 구래리는 1923년 일본인들에 의해 상동중석광산이 개광되면서 심산유곡이었던 이곳은 눈부신 발전을 하게되었고, 1973년 7월 1일에는 정선군 신동면 천포리 일부를 흡수하여 구래출장소를 폐지하고 상동읍으로 승격하였다.
구래는 행정 8개리 504가구에 2,000여명(1992년 기준)의 주민들이 상업과 고랭지 채소재배, 약초, 산채재배 그리고 마늘, 깨, 옥수수 등의 밭농사를 짓고 있다.

■ 본구래(본마을)
구래리(九來里)의 본마을이다. 본구래로 가자면 하천평리(下川坪里, 냇들) 봉우재 마을에서 내덕리의 반쟁이로 건너가는 봉우교를 지나야 한다. 1923년 상동 중석광이 개광되기 전에는 이곳이 상동의 중심지였으며 마을 뒤에는 백운산(白雲山, 1,426.2m)을 경계로 정선군(旌善郡) 고한읍(古汗邑) 박심마을과 접하고 있다.

1962년 본구래 물래방아골의 산지당 부근에서 텃밭을 일구다가 27cm 크기의 삼국시대(7C) 금동불상이 출토되어 서울 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자장법사(慈臧法師)는 644년(신라 선덕여왕)에 당(唐)나라에서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시고 와서 양산 통도사(通度寺)의 금강계단, 오대산 월정사(月情寺)의 적멸보궁, 설악산 봉점암, 영월 수주면 사자산의 흥령사(興寧寺, 법흥사), 그리고 정선 정암사(淨巖寺, 일명 曷來寺)에 적멸보궁(寂滅寶宮)을 건립한 후 사리를 봉안하였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자장의 꿈에 문수보살이 현몽하여 『태백산 갈반지(葛蟠地)에서 절터를 구하라.』고 하여 상동 본구래를 아홉 번이나 왔다 갔으므로 '구래리(九來里)'라는 지명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자장법사는 금동보살입상이 출토된 본구래 물방아골에다 관음전과 요사채를 건립한 후 명당터를 찾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절터를 찾아다니던 자장법사는 수백 년 묵은 아름드리 칡넝쿨에 앉아 쉬게 되었는데, 이 넝쿨이 워낙 크고 신비하여 그 줄기를 따라가보니 상동을 지나 정선 땅까지 뻗어 있었다고 한다. 자장은 기진맥진하여 그곳에 당도해보니 가히 부처님의 사리를 모실만한 천하의 명당으로 그곳에는 흰 눈이 쌓인 겨울철인데도 세송이의 붉은 칡꽃이 피어 있었다.

정암사는 칡줄기가 뻗어서 점지해 준 삼갈반처(三曷盤處)이므로 일명 '갈래사(葛來寺)'라고 한다. 자장은 이곳 삼갈반처(三葛盤處)에다 서해 용왕이 보내준 마노석으로 돌탑인 '수마노탑(보물 410호)'를 세우고 그곳에다 사리를 모셨으므로 그 아래 적멸보궁에는 불상이 안치되지 않으며 창을 통해 이 탑을 바라보며 예불을 드리고 있다.

이 전탑은 전돌이 아닌 마노석이라는 고급석재로 축조했는데 서해에서 가져온 마노석이므로 수(水)자를 써서 '수마노팝(水瑪瑙塔)'이라고 하였다. 정암사는 가파른 산자락에 지은 절집으로 탄광촌인 사북의 검은 모습과는 전혀 다른 또 하나의 별천지로 맑은 계곡과 주목나무가 너럭바위와 함께 어울려져 장중하면서도 아늑한 절집 분위기를 느끼게끔 해준다. 봉우재와 반정이를 지나 본구래로 들어가는 도로 옆 깊은 계곡에는 여름 한 철 찾아오는 사람들로 몸살을 앓고 있다.

■ 법호실
녹전면 직동리 화절치 마을과 경계를 이루는 법호실 마을은 본구래 남서쪽으로 경사진 비탈길을 따라가면 대여섯 가구가 사는 고원지대로 고랭지 채소와 약초 재배, 산채재배 등이 주 소득원이다. 법호실에는 구한말 나성일 의병장이 살던 집이 남아있으며, 토종벌과 사냥을 업으로 하는 문석주 씨와, 고랭지 채소와 약초를 재배하는 방창원 씨 등이 동네를 지키면서 살고 있다.
이곳은 일명 법궁리(法弓里라고도 하는데, 옛날 '법궁사'라는 절이 양지 뜸의 절골에 있었는데 지금도 기와장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 아우라지
민백산에서 시작되는 천평천(川坪川)과 어평에서 흐르는 물이 농거리에서 합쳐진 후 찰랑리에 이르러서는 백운산에서 시작되는 구래천(九來川) 물줄기와 하나로 어우러진다. '어우르다'의 작은 말로 '아울'에 접미사 '지'가 붙어서 '아울+(아)지→아울아지→아우라지'로 변했다. 따라서 이곳 역시 천평천과 구래천의 두 물줄기가 아울어(합쳐)지는 곳이므로 '아우라지'라 한다.

■ 턱골
교촌(校村)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백운산 줄기인 팍심재(박심재)를 넘으면 정선 고한으로 갈 수 있는 길목으로 대한중석상동광업소가 터를 잡은 곳이므로 '토골'이라 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턱골'로 변했다.

이곳에는 1923년 일본인들이 중석광업소를 개광하여 우리나라 중석 생산량의 80%인 연간 3,270톤을 생산했으며, 종업원수는 2,000명이 넘었다. 광산 경기가 좋았던 1973년에는 인구가 3만이 넘게 되자 상동읍 구래출장소는 상동읍사무소로 승격되고 면사무소가 있었던 녹전리(인구 1,300여명)는 출장소로 격하되었다. 대한중석 사무실과 선광장 그리고 종업원들의 사택이 있다.

■ 팍심재
턱골 북쪽에 있는 고개이다. 사북광업소가 있는 고한(古汗)의 박심으로 넘어가는 백운산 준령에 있는 고개이므로 '박심재→팍심재'라 하였다. 박심재에는 껍질을 벗겨 밧줄이나 신을 삼는 재피나무와 무공해의 산나물이 많은 곳으로 이 고개를 넘으면 부처님의 진신 사리가 모셔져 있는 정암사(淨巖寺) 일명 갈래사(葛來寺)로 가는 길이 있다.

■ 동그렁목
턱골 북서쪽으로 정선 박심과 화절치로 가는 길이 있다. 팍심재의 반대편으로 고갯마루를 빙빙 돌아가야 하는 큰 고개가 있어서 '동그렁목'이라 한다.

■ 꼴두바우(高頭岩)
상동 중석광업소 우측 골짜기에 있는 화강암(化剛岩)으로 된 큰 바위이다. 바닥의 넓이는 천여 평이 넘고 높이는 큰 빌딩 정도의 웅장한 벼랑이 치솟아 있으므로 '꼴두바우'라 한다. 예전 사람들은 상동을 꼴두바우라 불렀는데, 조선 선조 때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한 정철(鄭澈)이 이 바위를 보고 "먼 훗날 이 큰 바위 때문에 심산계곡인 이곳에 수만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이 바위를 우러러 볼 것이다."라 예언했다고 한다. 송강(松江) 정철(鄭撤)의 예언대로 상동중석이 번성했을 때는 수만 명의 인구가 이 바위를 우러러보며 살았었다.

옛날 구래리에 젊은 부부가 주막을 차리고 나이 든 어머니를 모시고 살아가고 있었는데, 다행히 손님들이 많아 먹고 살 만큼의 돈은 벌었으나 한 가지 걱정은 자식을 갖지 못한 것이었다. 며느리는 온종일 찾아오는 손님의 뒤치닥거리에 지쳐 쉴 때가 되면 시어머니는 그때부터 자식을 낳지 못하는 며느리에 대해 구박이 시작되었다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며느리는 도승을 찾아가 자신의 처지를 말하였다.

"스님, 저희 부부가 결혼한 지 10년이 되어 가는데 아직 자식을 얻지 못했습니다. 제발 아들 하나만 점지해 주십시오." 며느리의 말을 들은 늙은 스님은 "꼴두바위에 올라가서 석달 열흘 동안 치성을 드리면 자식을 얻을 수 있으나 그대신 주막집은 손님이 끊겨 당신네 집안은 다시 가난을 면치 못할 것이요."

이 말을 들은 며느리는 자식을 얻고자 하는 일념으로 하루도 쉬지 않고 꼴두바위에서 치성을 드렸다. 시어머니는 손자는 얻을 수 있으나 또 다시 가난한 생활을 해야한다는 얘기를 듣고는 며느리의 소행을 괘씸하게 여겨 며느리에게 밥도 주지 않고 구박과 학대를 다하였다. 이러한 시어머니의 학대를 받으면서도 꼴두바위에다 치성을 드리던 며느리는 결국 백일을 채우지 못하고 자식에 대한 한을 간직한 채 죽고 말았다.

그 후 하늘에서는 이 여인 대신 꼴두바위로 하여금 중석을 잉태하게 하여 한을 풀어주었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 후 마을 사람들도 그 며느리를 불쌍히 여겨 돌로 여자 모양의 꼴두각시를 깎아놓고 제사를 지내 주었는데, 일제때 일본사람들에 의해 파손되었다고 한다.

■ 꼴두바위 서낭당
꼴두바위 밑에 있는 서낭당이다. 대한중석에서 정월 대보름날 마을의 안녕과 광산 사고방지를 기원하는 당고사(堂告祀)를 지냈으나, 요즘에는 노인회에서 오월 단오에 당고사를 올리고 있다.

■ 저름박골
단양촌 뒤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옛날부터 이곳에는 소나무, 피나무, 엄나무같은 질 좋은 나무가 많아 깍개로 함지박이나 이남박 등을 절음질(만드는)을 하던 곳이므로 '절음박골→저름박골'이라 하였다. 함지박은 피나무를 파내어 큰 바가지같이 만든 그릇이고, 이남박은 곡식을 씻기에 편리하게 안쪽에 골이 만들어져 있는 옛사람들의 생활용품들이다.

■ 여내골(呂內谷)
단양촌 북쪽으로 길게 뻗은 계곡이다. 자연 경관이 빼어난 곳으로 여름한철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으로 대여섯 가구의 농가가 살고 있었다. 이곳 지명 유래는 임진왜란 때 여씨(呂氏)들이 피난을 하던 굴이 있었는데 여씨 가족들은 이 굴속에 있는 식토(먹는 흙)와 물을 마시면서 무난히 피난을 하였으므로 '여내골(呂內谷)'이라 하였다.
지금은 '여내골'을 '연애골'이라 부르는 사람들이 많다. 여내골에서 대유탄광으로 넘는 고개를 '여내골재'라 하였다.

■ 세송(細松)
단양촌 동쪽으로 잔솔밭이 있는 동네이므로 '세송'이라 한다. 지금도 비탈진 언덕 위에는 아름드리 전나무숲이 우거져 있고 고랭지 채소와 옥수수, 감자, 참깨 등을 재배하고 있다. 구한말과 일제 때는 우국지사들이 일본 헌병을 피해 숨어살았던 곳이라 한다.

■ 평화촌, 물방아골
세송(細松)뒤쪽으로 구강동과 신강동 사이에 있다. 원래의 지명은 계곡물이 쏟아지는 산기슭에 큰 물방아가 있어서 '물방아골'이라 불렀으나 광산이 개발되고 탄광 사택이 세워지면서 '평화촌'이라 부르게 되었다.

■ 어평(御坪)
농바우가 있는 농거리 위쪽으로 마을 가운데로 흐르는 하천을 경계로 영월 어평과 태백 어평으로 나누어진다. 마을의 남동쪽으로는 해발 1,560.6m 태백산(太白山)줄기가 뻗어있고 서쪽으로는 장산(壯山, 1,408.8m) 그리고 북쪽으로는 함백산(咸白山, 1,572.9m)과 연결되어 있다.

어평 마을은 임씨(林氏)들이 개척했으며 그후에 이씨, 박씨, 장씨들이 자리잡게 되었는데 일제 때는 이곳에 금광이 많았으므로 보크로 하천의 사금(沙金)을 채취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평 마을 가운데로 흐르는 하천은 막거리와 농거리를 지나 천평(川坪)에서 나오는 물과 합류되어 칠랑이를 거쳐 옥동천으로 흘러들어 하동면 맛밭에서 남한강 상류로 유입된다.

1985년 31번 국도가 개통되기 전에는 상동비행기재를 넘거나, 당목이재를 넘어야 상동에서 어평으로 다닐 수 있었다. 그리고 화방재를 넘어 삼척 혈리로 가는 길이 있었으나 지금은 31번 국도가 상동에서 농거리와 소도당골을 지나 태백으로 이어져 있다.

이곳의 지명 유래는 영월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조선 6대 단종 대왕이 관풍헌(觀風軒)에서 숙부인 세조가 내린 사약을 받고 승하하였으며, 그의 혼령은 태백산 산신령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영월, 정선, 산척 지방에 전해 오고 있는데 그때 이곳을 지나던 단종 혼령이 잠시 쉬었다 간 곳이므로 '어평(御坪)'이라는 지명이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단종 대왕이 잠시 쉬었다는 어평에는 지금도 단종의 혼령을 모시는 '단종 대왕당'이 있어 매년 마을 사람들이 제사를 올리고 있다. 백마를 타고 태백산으로 가는 단종 대왕에게 머루를 진상하는 추익한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 운보 김기창 화백이 그린 영정이 모셔져 있는 영월 영모전(永募殿)에서부터 『단종비각(端宗碑閣)』이 있는 태백산으로 가는 길목에는 마을마? 『端宗大王之神位』라고 쓰여진 위패와 함께 그의 영정이 그려져 있는 서낭당이 영월의 두평, 유전, 녹전, 정선의 여량 태백의 혈리, 어평 등지에 건립되어 있었다.

어평의 단종대왕당은 당목재와 큰골로 갈라지는 마을 가운데에 있는데 매년 정월 대보름에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제사를 지낸다. 당집 내부에는 단종대왕지신위(端宗大王之神位)라는 위패가 있고 당집 안에는 『어평성황중수서(御坪城隍重修序)』라는 현판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단종대왕은 성군으로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 땅에 내쳐지시니 돌아가신 후혼령이 태백산 산신령이 되어 가실 때 이곳에 이르러 어가를 잠시 멈추시고 휴식을 취하셨다. 이에 마을 이름도 대왕이 앉으신 곳이라 하여 어평이라 하였다. 이는 이름 있는 옛 자취의 땅으로 전해오는 곳이니 조상들 때부터 당우를 건립하여 신위를 모셨다. 단종대왕의 혼령은 태백산 산신령이며 어평 마을의 수호신이니 대왕의 혼령이 계신 곳이면 만복과 행운과 영화를 내리시니 어쩌 신령이 없다하리오.…(중략)…영각이 파손되어 비바람을 면치 어렵게 되었으므로 모든 사람들이 협력하여 영각을 복원하니 천추만대 대대로 잊지 말고 모시어 재액을 물리쳐 주시길 비옵니다.

태백산 천평에서 혈리로 넘어가는 새길재(1,130m) 산마루에 쿠시당과 큰엄나무(개드룹나무)신목이 있다. 그리고 옆에는 길손과 보부상(褓負商)들의 안전을 기원하는 당집이 있는데 이곳에도 태백산 산신령이 되었다는 단종대왕의 신위(神位)와 백마를 탄 어린 임금이 그려진 영정이 모셔져 있다. 당집 현판에는 『태백산 산령각(太白山 山靈閣)』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그 안에는 『태백산 산령지신위(太白山 山靈之神位)』라고 쓴 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4월 15일 당고사를 올리고 있다.


■자료출처:「영월 땅 이름의 뿌리를 찾아서」저자 엄흥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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